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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속 남녀 역할 함부로 규정짓지 마라

by bomida 2017. 8. 2.


1960년대 미국의 청소기 광고(왼쪽)와 2017년 광고(아래). 여전히 청소를 하는 사람은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이들이 광고 속에서 시리얼을 함께 먹고 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일기를 쓰는 장면이 비쳐지더니 자신의 꿈은 발레리나라고 말한다. 파란색 슈퍼맨 옷을 입은 남자아이는 수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깡마른 모델이 노란 비키니를 입고 서 있다. 이 젊은 여성의 사진 옆에는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고 싶다면 보조제를 먹어보라고 권하는 광고문구가 적혀 있다.


두 사례 모두 영국에서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았던 광고들이다. 특히 두 번째 보조제 광고는 7만명이 광고 금지 청원에 나서는 등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남녀의 역할과 색깔, 행동까지 규정하는 듯한 이런 광고는 앞으로 영국에서 찾기 힘들어질 전망이다. 지난 7월 19일(현지시간) BBC 등은 광고표준위원회(ASA)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할 수 있는 광고를 규제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소녀와 소년, 꿈을 나누지 마라

위원회의 기준에 따르면 잔뜩 어질러진 집안을 엄마 혼자 열심히 치우고 다른 가족들은 무관심한 장면도 성차별적인 묘사에 들어간다. 여성의 성 역할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아빠들의 가사노동과 보육에 대한 역할을 훼손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의류브랜드 ‘갭(GAP)’이 어린이옷 광고에서 남자아이는 ‘작은 학자’(Little Scholar), 여자아이에겐 ‘사교성이 좋은 아이’(Social Butterfly)라는 문구를 단 것도 마찬가지다. ASA가 규제하는 항목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보여주는 것도 포함된다. 위원회 측은 앞서 논란이 된 보조제 광고에 대해 “다른 몸매를 가진 여성들에게 수영복을 입을 만큼의 자신감을 갖기 위해선 보충제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부끄럽게 만들었다”며 규제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의류브랜드 갭(GAP)이 아동복 광고에서 여자 아이에겐 ‘사교성이 좋은 아이’(Social Butterfly)(아래), 남자아이는 ‘작은 학자’(Little Scholar) (위)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 같은 결정은 차별적인 고정관념을 제시하는 광고가 성인과 아이들 모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위원회는 “타인을 보는 시각, 자신에 대한 시선에 한계를 만들어 삶의 결정방식을 제한한다”며 “성차별적 묘사는 엄격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ASA는 영국 광고업계의 독립적인 규제기관으로 벌금 부과 같은 제재권한은 없다. 그렇지만 문제가 된 광고를 온라인에서 배제할 수는 있다. 방송사들의 경우 방송허가를 따거나 갱신할 때 ASA의 규정을 준수했는지가 조건으로 붙기 때문에 광고제작사들도 이번 조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성 역할 묘사가 전면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검토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부담만으로도 향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가이 파커 ASA 최고경영자(CEO)는 “틀에 박힌 시각을 광고가 강화하게 되면 불공평한 인식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불평등을 해소하고 개인과 사회 전체의 성차별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기업 이윤 좌우하는 평등 감수성

기업들의 성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윤리적인 차원뿐 아니라 수익을 위해서도 중요한 가치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는 600만개의 게시물을 분석한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이를 토대로 양성평등의 의미를 담은 언어로 소비자들에게 접근하는 브랜드의 매력도가 그렇지 않은 쪽보다 8~10% 정도 높았다고 설명한다. “도덕성과 회사의 이윤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익을 위한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다. P&G의 글로벌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짐 스텡겔은 “(성평등을 위한) 노력 없이는 여성고객을 유치할 수 없으며, 이는 회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큰 성명”이라고 말했다.


광고가 평등한 세상을 그리려면 이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광고분야에서 먼저 성평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광고업계 종사자의 절반(46.4%·2014년 기준)이 여성이지만 실제 완성을 담당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급 최고책임자는 11%에 그친다. 글로벌 홍보대행사 ‘제이월터톰슨(JWT)’이 칸 광고제에 출품된 2000여건의 광고를 분석한 결과, 여성이 등장한 경우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또 광고 속 남성의 언어는 여성보다 더 복합적인 언어(complex language)를 구사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에선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특히 여성 고위직이 늘어야 광고 속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다.



■평등한 현실 없이, 광고 속 성평등은 불가능

최근 광고회사의 남성 경영진들이 잦은 구설에 올랐다. 세계 최대 홍보대행사 ‘사치 앤드 사치(Saatch i& Saatchi)’의 케빈 로버츠 최고경영자(CEO)는 “여성의 야망은 수직상승(승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바라는 내면적이고 순환적인 야망”이라고 했다가 지난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사퇴했다.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직장 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JWT의 구스타보 마르티네즈 회장 역시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돼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뉴욕의 광고회사 ‘바틀 보틀 헤가티’의 전 회장 신디 갤럽은 광고의 성적·인종적 편견을 없애는 유일하고도 지속적인 해결책은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출신들이 광고회사를 차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백인 남성들이 더 주의를 기울여 광고 속에서 여성들을 다뤄줄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만큼 고용되고 승진하는 게 필요하다”고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여성이 광고를 만들고 (내용에 대한) 승인도 하면 되는 거죠. 그들(백인 남성)은 남녀평등과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지금의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