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시&이슈/집 이야기

[집의 재구성 살고 싶은 家](7) 집값 악명높은 런던에 내가 지은 내 집 ‘셀프 빌딩(self-building)’

by bomida 2016. 12. 5.



‘내 집’을 갖는다. 가족들의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 내 손으로 지은 집이다. ‘셀프 빌딩(self-building)’은 단어 뜻 그대로다. 건설사에서 똑같이 제작한 아파트, 건축사무소에서 제안한 설계로 짓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갖고 싶은 공간들로 채운 집이다.


영국 런던 루이셤 지역 월터스 웨이에 ‘셀프빌딩’ 방식으로 지어진 주택 내부 모습. 집의 외형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집안을 보면 거실 한가운데 2층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이 불쑥 솟아 있는 등 각자의 개성을 살려 꾸몄다. 영국 사진작가 타란 윌크후(Taran Wilkhu) 제공


영국 런던 남동부의 자치구 루이셤에는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로 둘러싸인 런던 도심 주택가에서 볼 수 없는 집들이 늘어선 동네가 있다. 경사진 언덕길에 상자 형태의 목조 주택들로 이뤄진 마을이다. 네모반듯한 단조로운 외형, 커다랗고 널찍한 유리창들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면 기둥 하나, 창문틀 하나도 같은 집이 없다. 골조의 색깔은 갖가지, 베란다가 나 있는 방향과 구조도 제각각이다. 거실 한가운데 2층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불쑥 솟아 있기도 하고, 요가 스튜디오가 있는 집도 있다. 뒤뜰 나무 위에 얹어놓은 오두막도 눈에 띈다. 


골목길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이 주택들은 40년 전, ‘내 집은 내가 짓는다’고 결심한 이들이 ‘셀프’로 건축했다. 기술도, 지식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설계부터 구조, 배관 등의 공사와 내부 인테리어까지 직접 완성했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는 인상은 이 같은 아마추어 건축가들의 손길 때문일 것이다. 


건축 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설계도면에는 최소한의 정보만 담겨 있다. 기본 뼈대는 얇은 나무와 넓은 패널을 반복해 겹쳐 만든 체크무늬 격자구조(tartan grid)다. 목재 구조물을 틀로 세운 뒤 층과 지붕을 얹고, 여기에 패널로 벽을 덮어 완성했다. 바닥은 기초(foundation)를 깔지 않고 콘크리트 말뚝(concrete piles)과 포장용 평판(paving slabs)으로 대신했다. 말뚝 위에 기둥(stilt)은 세우되 나사로 조이는 식의 접합 작업은 하지 않았다. 재료를 절단하는 작업도 거의 없었다. 가벼운 목재 골조를 올리는 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회반죽을 칠하거나(미장) 벽돌을 쌓아올리는 과정도 없었다. 이후 배관과 배선을 깔고, 내부 장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영국 런던 루이셤 지역에서 건축가 월터스 시걸이 1980년대 ‘셀프빌딩’에 사용했던 건축 골조. 영국건축협회건축학교(AA) 홈페이지



1977년부터 10년간 27채의 ‘셀프 빌딩’이 루이셤 지역에 생긴 것은 “직선만 자를 수 있다면 누구든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한 건축가 월터스 시걸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인 ‘월터스 웨이(Walters Way)’와 ‘시걸 클로즈(Segal Close)’로 둘러싸인 마을에는 여전히 집을 ‘셀프’로 가꾸는 사람들의 주택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시걸이 단순한 집짓기 방식을 고안한 것은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원하는 바가 가장 잘 반영돼야 한다’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이유 때문이다. 구조는 골격이 전부. 벽면은 하중을 견디는 내력벽이 아닌 패널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 자식들이 커서 독립을 한다. 가족들의 생활 방식은 시간에 따라 변하고 필요한 공간도 달라진다. 그때마다 집구조를 마음껏 개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셀프 빌딩을 만들었다. 구하기 쉬운 재료로 살짝 바꾼 건축법을 궁리하면 누구든 원하는 대로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시걸의 철학이었다. 


18년 전 루이셤으로 이사 온 이언 화이트는 이 같은 셀프 빌딩의 장점에 대해 “형태를 끊임없이 바꿀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의 필요에 따라 집을 고치기 쉽다”며 “표본 사이즈의 목재와 플라스터 보드(석고보드)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패널을 간단히 해체하는 수고만 들이면 이동시킬 수 있다”고 가디언에 전했다. 



‘시걸 건축 방식’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그의 집 한구석에 있던 작은 오두막이었다. 낡은 집을 부수고 신축하면서 공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머물기 위한 임시 거처였다. 이후 멋진 새 벽돌집이 완성됐지만 구경 온 이웃들은 허름한 나무집에 더 관심을 보였다. 특히 나무로 틀을 짠 뒤 슬레이트를 얹은 오두막을 짓는 데 800파운드밖에 들지 않았다는 점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시걸은 이때 스스로 집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동경을 확인했다. 



영국 런던 루이셤 지역 월터스 웨이에 들어선 ‘셀프빌딩’ 모습. 가벼운 목재로 기본 틀을 만들고 벽면을 패널로 제작해 누구나 쉽게 지을 수 있는 설계다. 내부 기둥은 바닥과 접합돼 있지 않아 집안의 공간 구조를 수시로 바꿀 수 있다. 영국 사진작가 타란 윌크후(Taran Wilkhu) 제공


시걸과 일했던 건축가 존 브룸은 올해 출판된 <시걸을 기념하며(Celebrating Segal)>에서 “거주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맡았다. 간단하면서도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공사를 했기 때문에 저소득층도 참여할 수 있었다”며 “은퇴한 사람이나 건축 기술이 없는 사람, 즉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집을 만든 것”이라고 전했다. 


실험성이 컸던 이 건축법은 당시 부동산 시장에서 큰 주목은 끌지 못했다. 설계와 구획 등이 규정에 맞지 않았고 땅값이 비싼 지역에선 비용 효율성이 떨어지며 품질도 낮아 시장에 공급하기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관심을 보인 것은 민간이 아닌 공공이었다. 루이셤 지역의회는 비탈의 경사가 심해 주택을 공급하기 어려웠던 땅에 건축허가를 내주면서 시걸의 방식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의회는 예비 거주자들을 모아 99년간 장기로 토지를 빌려줬다. 토지 임대료는 최소한으로 산정됐으며, 건축비 대출이 필요한 이들은 의회에서 보증을 섰다. 임대료는 지은 주택의 가치가 올라갈수록 오히려 낮아졌다. 입주자가 저렴한 값으로 임차한 부동산에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해 가치를 올리면 그만큼 집에 대한 지분이 늘어나고 결국 소유권을 갖는 식이다. 일종의 노동제공형 가옥소유제였던 셈이다. 그렇게 지어진 27채의 집은 대부분 집값이 올랐다. 브룸은 “지자체가 땅과 재정을 지원했고, ‘셀프 건축가’들이 스스로 집을 완성한 급진적인 주택 공급 방식이었다”고 회고했다. 


시걸의 스스로 집짓기 방식은 무엇보다 예산을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맞출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건설사 등에서 지은 집은 입주자가 값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 못한다. 완성된 집을 사는 것보다 저렴하게 집을 가질 수 있는 셀프 집짓기는 그래서 대안이 될 수 있다. 영국은 지불 가능한 주거지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2014년까지 60곳의 지방의회에서 5000개 구역을 셀프 빌딩 가능 지역으로 지정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심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런던에서 셀프 빌딩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올 1분기 주택값이 4.2%나 올라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런던은 내 집 갖기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도시 중 하나다. 시걸의 마을에서 자란 카림 데예스가 런던에서 직접 집을 짓는 방식으로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는 실험에 나서자 많은 이들이 호응을 나타낸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데예스는 토지신탁(Rural Urban Synthesis Society·Russ)을 만들어 33채의 셀프 빌딩을 짓기로 했다. 런던 자치구 레이디웰 의회에서 공유지를 장기로 임차받아 예비 거주자들이 직접 짓되 이들이 내야 하는 토지, 주택에 대한 임차료는 각자의 수입과 연동시켜 주거비 부담을 낮추는 것이다. 특히 신탁에서 각 주택의 지분을 20% 이상 보유해 집주인이 집값이 오르면 팔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 주택이 영속적으로 지불 가능한 주거지로 남도록 만들어볼 생각이다. 


33채 중 5채는 사회적 임대주택으로, 2채는 청년을 위한 공유주택으로 만들 예정이다. 나머지 14채 역시 공동소유 형태로 일반에 공급한다. 공동소유 주택을 토지신탁이 임대한 후 저소득층에게 저렴하게 재임대(전대)하는 방식으로 주거빈곤층에게 집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12채는 25%의 지분을 거주자가 보유하고, 스스로 집을 가꾸는 수준에 따라 최대 12%까지 더 지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집에 대한 주인 의식을 높일 방침이다. 


데예스는 “거주자들이 디자인과 건설에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면 이사 오기 전부터 이웃들을 만나 유대감을 형성해 궁극적으로는 공동으로 운영과 관리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루이셤 의회와 셀프 빌딩을 운영 중인 사회적 단체 ‘아워런던’의 레벤트 케리멀은 “셀프 빌딩은 맞춤형 주택을 파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에 대한) 민주주의와 공동의 노력”이라며 “셀프 빌딩이 고밀도 도시 지역에서도 가능한 대안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