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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전하는 도시]일반주택·공공임대 섞어 개발해 ‘사회적 혼합’… 런던 포플라의 실험

by bomida 2015. 3. 4.




ㆍ(4) 런던 포플라의 실험

▲ 개발 이익, 마을로 환원 청년층 ‘마을 주체’로
육성 이주자 거주 극빈층 지역 20여년 만에 환골탈태


도시마다 사각지대가 있고, 거기에 소외된 이들이 모여든다. 낡은 집들, 가난, 교육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도시의 문제들이 그곳에 고인다. 영국 런던에도 이런 곳이 있다. 템스강 줄기가 남쪽으로 옴폭 꺾이는 ‘포플라’(Poplar)가 그곳이다. 지난 1월16일 버스를 타고 동네에 들어서자 남아시아에서 쓰이는 벵골어 간판이 보였다. 골목에는 아시아계 주민들이 가득했다. 여성들은 대부분 히잡을 썼고, 차도르나 검은 아뱌야(겉옷)를 입은 이들도 있었다. 버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하는 이들 중 영어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타워햄릿 자치구의 작은 동네 포플라의 주민 중 백인은 23%뿐이다. 방글라데시 출신이 열명 중 넷이고, 무슬림(44%)이 절반 가까이 된다. 실업률은 영국 전체 평균의 2배인 15.7%다. 저소득층이 많아서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가정이 절반 이상(50.9%)이다. 런던의 금융신도시 카나리워프의 마천루들을 지척에 둔 포플라는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며, 빈곤의 역사가 200년이 넘는다.

런던의 비영리단체 포플라하카가 관리하고 있는 마을 안 공원. 우범지역이었던 곳이 주민 휴식처가 됐다. 이 단체는 건물 재개발로 얻은 수익을 주민 교육과 마을 환경개선 등에 재투자하고 있다. 런던 | 김보미 기자


■ 개발 이익은 주민 몫으로

하지만 포플라는 바뀌고 있다. 그 변화는 사회적 기업 포플라 하카(Poplar HARCA)가 활동하는 규모 3㎢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 하카는 ‘주택과 공동체 재생산협회’(Housing and Regeneration Community Association)의 줄인 말이다. 이들은 부동산 개발을 통해 ‘마을의 재구성’에 도전하고 있다. 저소득층을 위한 집 8500채를 보유한 하카는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키우고 자치를 확대하는 데에 이익을 환원해왔고, 그 성과는 마을 곳곳에 나타나 있다.

1950~1960년대 지은 아파트가 늘어선 포플라 세인트폴스웨이에 들어서자 동네 사랑방이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카페 ‘페이퍼 앤드 컵’은 번 돈으로 주민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마을을 후원하세요’라는 글이 쓰인 셔츠를 입은 점원 중에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재활치료를 받고 취직한 사람도 있다. 주변 미용실과 공방도 주민들이 연 마을가게다. 카페 옆에는 어린이집이, 위층에는 주민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한 쪽 방은 영어, 다른 방에서는 컴퓨터를 가르친다. 하카가 만든 마을교육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은 대개 아시아계 이주여성이다.

마을상점과 교육 공간, 주민 프로그램에 필요한 자금을 모두 포플라 내 건물 재개발에서 얻는다. 카페 앞 12층짜리 신축 빌딩은 하카가 민간업체와 함께 2층짜리 낡은 건물을 증축한 것인데 공공임대 등 사회적 주택으로 쓸 2개층을 빼고는 민간에 팔았다. 이런 수익과 정부·기업의 보조금이나 기부금을 합쳐 연간 400만파운드(약 80억원)를 모은다. 개발이익은 고스란히 주민에게 돌아간다.

하카 주택의 입주자는 2만5000명이지만 하카의 활동은 포플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경전철(DLR) 랭던파크역은 대중교통이 부족한 지역 사정을 하카와 주민들이 정부에 요구해 얻어낸 성과물이다. 300명이나 되는 하카 직원들은 포플라의 모든 주민들이 지역 개발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구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 많은 영국에서도 이런 재투자는 흔치 않다.

왜 주택단지를 넘어 마을 전체일까. “거주자만 교육하는 것은 커뮤니티(지역)를 살리는 개념이라고 볼 수 없어요. 전체를 바꾸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깨끗한 건물이나 포장도로가 삶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죠. 커뮤니티가 단절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강한 공동체는 주민들의 자부심에서 나오는데 그러려면 마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건물에 얼마를 투자해 몇 층이나 높아졌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죠.” 하카 지역주민 디렉터 바부 어차르지의 설명이다.

영국 런던의 비영리단체 포플라하카가 마을 청년들을 위해 마련한 건물 ‘스포트라이트’ 내 녹음실에서 청소년들이 방송을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포플라하카 페이스북


포플라하카가 운영하는 컴퓨터 교실에서 주민들이 지난 1월16일 수업을 듣고 있다. | 포플라하카 페이스북


■ ‘소셜 믹스’가 성공의 관건

하카가 재건축한 건물에는 1~2개 층에 사회적 주택이 들어간다. 집 없는 사람들에게 싼 집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새로 생기는 주거지에 일반 주택과 공공임대가 공존하게 되면서 여러 계층이 섞이는 효과가 있다. 재건축한 건물 1층에는 대개 마을기업들이 입점한다. 유통업체는 대기업보다 소규모 상점에 우선권을 준다.

이 단체가 포플라에 다양한 계층을 담는 소셜 믹스(사회적 혼합) 주택가를 만드는 것은 수십년간의 도시재생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영국 정부의 정책과도 일치한다. 포플라가 위치한 런던 동부의 도크랜드는 영국이 식민지를 확장하고 미국과 교역을 늘렸던 17~19세기 쉼 없이 원자재와 완제품을 나르던 물류 중심지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활기를 잃었다.

1970년대부터 이 거대 유휴지를 고층 업무지구로 바꾸는 계획이 추진돼 1990년대 카나리워프를 중심으로 한 도심 재개발이 이뤄졌다. 영국의 첫 무인 경전철 도크랜드 라인이 깔렸고, 지하철 주빌리 노선도 연장됐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는 도크랜드 고속도로와 런던 동서를 잇는 라임하우스 링크 터널, 도심공항인 런던시티공항도 생겼다. 카나리워프를 둘러싼 템스강 주변은 고급 거주지역이 됐지만 바로 옆 포플라는 번화가 속 섬으로 남았다.

1998년 노동당 정부는 이곳의 재생을 맡을 단체를 뽑아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카는 포플라를 바꿀 방안을 제시했다. 타워햄릿 자치구는 공공주택들을 시민단체로 넘기기로 했다. 주민들은 임대주택 단지별로 지자체 관리하에 남을지 하카로 갈지를 놓고 투표했다. 형편없는 기반시설과 낡은 주택에 불만이 컸던 7개 단지 4500가구는 즉시 하카를 선택했다. 주택 소유권과 세입자 관리 의무가 하카로 넘어갔다.

하카 주민권한매니저 핀탄 타이넌은 “주민들은 특히 정부의 주택정책에서 소외돼 왔다는 인식이 컸고 운영에 참여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주택관리는 전문가가 할 수 있지만, 주민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단지별 주민운영위원회를 꾸리고 위원장들이 모인 이사회에서 하카의 활동 을 결정한다. 지금까지 포플라 지역에서 12개 단지가 하카 소속이 됐다.

지역 부동산 관리를 맡은 포플라하카는 건물 재개발로 얻은 수익을 주민 교육 등에 재투자하고 있다. 런던 | 김보미 기자


■ 젊은이들을 살려야 마을이 산다

하카는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가장 공을 들인다. 파이넌은 “1~2인 가구보다 아이가 있는 가족 거주자가 많기 때문에 포플라의 청년 인구비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다”며 “청년들도 마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카의 임대주택에는 단지별로 주민위원회가 있고, 위원장들이 모여 지역 일을 논의한다. 여기에 청년권익위원회를 만들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했다. 11~19세 아이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는 청년층의 요구를 전달하기도 하고, 마을 안전을 개선하는 활동을 제안해 참여하기도 한다.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청소년들이 특정지역에 몰려 있지 않도록 마을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를 또래들에게 알려주거나 지역 범죄보고서를 만화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랭던파크역 앞 ‘스포트라이트’는 청년들의 아이디어로 지어졌다. 음악 녹음실과 공연장, 체육관과 권투장, 크고 작은 회의실 등 이 건물에 있는 시설은 모두 지역 청년층들을 위한 것이다. 체육·음악강좌는 마을에서 재능기부를 받아 이뤄지기도 한다. 체육관에서는 인근 랭던파크스쿨 중학생들의 수업이 한창이었다. 운동장이 없는 이 학교는 마을 시설을 나눠쓰고 있었다. 청년들은 목공·전기 기술을 배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보건교육을 받고 마을과 파트너십을 맺은 병원에 견습생으로 가기도 한다. 지역 학교가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지 못하자 하카가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킹스칼리지런던과 워윅대, 퀸메리런던대 등 대학들의 지원을 받아 세인트폴스웨이에 ‘신탁학교’(Trust School)를 꾸리기도 했다.

20년 가까운 실험은 조금씩 마을을 바꾸고 있다. 정부의 ‘지역빈곤지수’(Index of Multiple Deprivation) 조사에서 2005년 포플라는 최악의 결과를 냈지만 2010년 꼴찌에서 벗어났고 지금은 약 3만2500개 지역 중 뒤에서 12번째 정도까지 올라왔다. 랭던파크스쿨은 정부의 학업성취도 기준도 통과했다. 신탁학교를 비롯해 하카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같은 지역에 있는 매나필드, 바이그로브 초등학교는 영국 교육기준청 종합평가에서 가장 좋은 등급을 받았다.

17년간 집들을 고치고 지역 이주민 재교육에 초점을 뒀던 하카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올세인트역 앞 크리스프 시장 재개발로 마을 상권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2006년 시장 부근 주택단지가 하카에 들어오면서 1950년 문을 연 오래된 시장도 함께 넘어왔다. 지역이 쇠퇴하면서 시장도 15년 전부터 쇠락해가던 상황이다. 최근 크리스프의 빈 가게 하나를 마을 청년이 임대해 자전거 수리점을 만들었다. 시몬 캐럴 포플라하카 공간서비스담당자는 “지역성을 유지하면서 여가활동에서조차 소외됐던 주민들이 마을 안에서 즐길거리를 찾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며 “목 좋은 시장의 장점을 살려 이익을 높이면 마을기업의 임대료를 낮추는 식으로 주민들에게 재투자할 여력이 커진다”고 했다.

시장이 활성화되면 일자리까지 만들 수 있다. 민간업자와 재개발을 하되 수익금은 시장을 바꾸는 데 쓸 예정이다. 포플라에는 아직 대형 영화관이나 큰 상점들이 없다. 시장이 새 모습을 찾으면 주민들이 도심에 나가지 않아도 여가를 즐길 수 있을 것으로 하카는 기대하고 있다.


[도전하는 도시]이윤만 좇는 재개발, 지역격차 등 부작용 환경보전·복지 등 ‘주민 참여 개발’로 선회

ㆍ‘도시 속 마을 만들기’ 왜

인구 1000만명인 대도시 서울에도 ‘마을’이 살아 숨쉴 수 있을까. 세계의 대도시들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나마 사무실과 공장이 가득했던 도심도 대개 수십년 사이에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으며 ‘도시재생’은 세계의 화두가 됐다. 특히 쇠락해가는 곳들은 물리적 환경이 열악한 데다 이주자들이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많다.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린 이런 지역은 더 오랫동안 뒤떨어진 채 남아 있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영국에서 이민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던 1990년대에 ‘커뮤니티 뉴딜’이라 불리는 마을재생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커뮤니티 뉴딜 사업은 주거문제뿐 아니라 주민교육과 직업훈련을 해결할 방안을 제시한 지역 단체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극적으로 주민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주민참여 없이 이윤을 좇아 이뤄지는 재개발은 오히려 원주민을 몰아내고 지역 격차만 키운다는 것은 한국의 재개발사업들이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영국 정부는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전국 39곳에 20억파운드(약 3조5000억원)를 쏟아부었다. 정부 지원을 받은 시민 자치단체들은 범죄를 줄이고 뒤처진 학교교육을 바꾸려 애썼으며 주민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런던에는 평생학습관과 비슷한 ‘아이디어 스토어’가 시장이나 쇼핑센터에 붙어 있다. 저소득층과 이민자들이 쇼핑지와 연계된 장소를 원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1970년대 오일쇼크로 정부나 민간기업 주도의 부동산 개발이 타격을 받은 뒤 마을 살리기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특히 외부 자본이 주도한 개발에는 주민들이 원하는 환경보전이나 지역복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점도 이런 움직임에 한몫했다. 당시 시작된 ‘마치즈쿠리(마을만들기)’는 지역의 생활환경 파괴에 대한 반발의 형태를 띠었다. 환경을 되살리고 역사적 경관을 보전하거나 일조권 등 주거환경 권리를 찾는 운동이 된 것이다.

오이타(大分)현의 유후인(由布院)은 주변에 철강·석유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농업의 쇠퇴를 겪었다. 주민들은 개발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던 온천을 수익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온천 도시들이 대기업을 끌어들여 리조트 짓기에 매달린 것과 달리 주민들의 삶을 지키고 주민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을 관리했다. 지역에서 기른 식재료로 식당을 꾸리고 온천 여관에 딸린 매장에서 농민들이 만든 잼과 과자를 판다. 마을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이곳 주민들은 유후인을 일본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탈바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