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런던 사우스뱅크 코인스트리트의 힘
▲ 민간 건설사 자본 밀어내고 1984년부터 재개발 주도, 공원·강변 산책로 조성
시세의 25% 임대주택 건설 지역민 위한 마을로 탈바꿈
영국 런던의 템스강 남쪽 사우스뱅크는 문화의 중심지다. 시민들이 사랑하는 미술관 테이트모던이 있고 밤이면 야경을 보러 사람들이 몰린다. 강가에 솟은 뾰족한 탑도 이곳의 상징이다. ‘OXO’라는 간판이 불을 밝히는 옥소타워다. 타워 꼭대기, 8층에 위치한 식당과 카페는 줄을 서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런던에서도 ‘금싸라기 땅’으로 꼽히는 옥소타워에는 1주일 임대료가 80파운드(약 15만원)밖에 되지 않는 주택이 70여채가 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 민간 건설사 자본 밀어내고 1984년부터 재개발 주도, 공원·강변 산책로 조성
시세의 25% 임대주택 건설 지역민 위한 마을로 탈바꿈
영국 런던의 템스강 남쪽 사우스뱅크는 문화의 중심지다. 시민들이 사랑하는 미술관 테이트모던이 있고 밤이면 야경을 보러 사람들이 몰린다. 강가에 솟은 뾰족한 탑도 이곳의 상징이다. ‘OXO’라는 간판이 불을 밝히는 옥소타워다. 타워 꼭대기, 8층에 위치한 식당과 카페는 줄을 서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런던에서도 ‘금싸라기 땅’으로 꼽히는 옥소타워에는 1주일 임대료가 80파운드(약 15만원)밖에 되지 않는 주택이 70여채가 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런던 시민들이 지난달 19일 마을만들기 비영리단체 코인스트리트가 동네 상점들을 위해 개발한 시장인 가브리엘 워프 근처를 걸어가고 있다. 뒤에 보이는 고층 빌딩도 이 단체가 재개발한 것이다. 런던 | 김보미 기자
템스강 일대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주인공은 비영리단체 ‘코인스트리트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CSCB)이다. 30여년 전 마을만들기 운동을 이끈 이곳 주민들이 주축이 된 조직이다. 당시 옥소타워 주변은 선착장과 창고, 공장들이 가득했다. 해운업이 활황이던 때 물자가 끊임없이 드나들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부두와 공장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방치됐던 사우스뱅크는 국제금융도시 개발 바람이 불면서 1970년대 재개발이 시작됐다. 민간 건설회사가 초고층빌딩을 지어 호텔과 사무실을 유치하겠다는 제안도 냈다.
항만·공장 노동자들이 많던 코인스트리트 주민들은 이런 개발이 돈 없는 이들을 거리로 내몰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들은 마을만들기 사업체를 꾸리고 공원과 임대주택을 지어야 한다며 맞섰다. 런던광역시 의회는 두 안을 모두 승인했지만 지자체는 주민운동 쪽에 힘을 실어줬다. 1984년부터 주민들이 만든 CSCB가 사우스뱅크 항구 재개발을 주도하게 됐다.
이들은 창고와 공장을 걷어내 공원을 만들고 강가에 산책로를 가꿨다. 주택조합은 집을 지어 싼값에 공급했다. 옥소타워에도 전시공간과 식당, 카페를 새로 만들어 재활용하면서 싼 임대주택을 지었다. 임대료는 시세의 4분의 1 수준만 받는다. 지금까지 220채의 조합주택을 지었고 1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무료 교육센터도 지었다. 강변의버려진 차고에는 ‘가브리엘 워프’라는 상점가를 만들어 동네상인들이 가게를 열었다. 코인스트리트의 모든 결정은 여전히 주민들에 의해 이뤄진다. 이사회 구성원 18명 중 14명이 거주자인데, 1980년대 주민운동에 참여했던 5명이 아직도 활동 중이다.
항만·공장 노동자들이 많던 코인스트리트 주민들은 이런 개발이 돈 없는 이들을 거리로 내몰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들은 마을만들기 사업체를 꾸리고 공원과 임대주택을 지어야 한다며 맞섰다. 런던광역시 의회는 두 안을 모두 승인했지만 지자체는 주민운동 쪽에 힘을 실어줬다. 1984년부터 주민들이 만든 CSCB가 사우스뱅크 항구 재개발을 주도하게 됐다.
이들은 창고와 공장을 걷어내 공원을 만들고 강가에 산책로를 가꿨다. 주택조합은 집을 지어 싼값에 공급했다. 옥소타워에도 전시공간과 식당, 카페를 새로 만들어 재활용하면서 싼 임대주택을 지었다. 임대료는 시세의 4분의 1 수준만 받는다. 지금까지 220채의 조합주택을 지었고 1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무료 교육센터도 지었다. 강변의버려진 차고에는 ‘가브리엘 워프’라는 상점가를 만들어 동네상인들이 가게를 열었다. 코인스트리트의 모든 결정은 여전히 주민들에 의해 이뤄진다. 이사회 구성원 18명 중 14명이 거주자인데, 1980년대 주민운동에 참여했던 5명이 아직도 활동 중이다.
개발되기 전 옥소타워 전경. | 코인스트리트커뮤니티 빌더스 페이스북
코인스트리트 이야기는 주민들 손으로 마을을 살린 사례로 유명해졌다. 코인스트리트가 마을만들기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탄탄한 수익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강가의 콘퍼런스 시설과 상가, 식당 임대료와 주차장, 옥소타워의 레스토랑 등에서 연간 360만파운드(약 70억원)를 벌어들인다.
하지만 이 막대한 수익금은 ‘초심을 잃었다’는 비난을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코인스트리트는 2008년부터 주민센터 주변 둔스트리트에 43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과 주민들이 이용할 실내수영장, 스포츠센터 등을 짓는 종합개발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중산층을 겨냥한 주택 300여채도 포함돼 있다. 주민 교육과 기반시설 확보에 수익을 썼던 데서 벗어나 영리를 추구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루이즈 킹 CSCB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지난달 19일 “주민과 지역이 필요로 하는 것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유연하게 수요를 조정하기는 하지만, 주민단체가 처음 결성됐을 때의 목적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킹 팀장은 “주민센터 내 공연장에서는 매월 마지막 금요일 지역의 영화제를 여는데 최근 같은 날 민간 임대수입을 벌 수 있는 요청이 들어와 고민을 할 때도 있었다. 가끔 수익과 자체적인 사용을 두고 우선순위가 상충될 때도 있다”고 전했다. 내적인 가치충돌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코인스트리트의 사업과 주택운영의 의사결정이 이사회를 통해 이뤄지는 만큼 주민들의 선택을 따라야 한다고 CSCB는 설명하지만 비영리 단체로 출발했던 시기에 지자체로부터 혜택을 받았던 만큼 사회적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런던광역시청은 1980년대 시장가격의 20% 수준도 안되는 헐값에 토지를 코인스트리트에 넘겼다. 임대주택도 2001년 이후로는 추가로 짓지 않고 있다. 특히 코인스트리트는 지자체가 가진 사회주택우선자 명단에서 임대주택 입주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 논의를 통해 정하기 때문에 장벽도 높다. 이 때문에 새로운 입주자는 1년에 1가구 수준이어서 기존 단체 구성원들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주민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만든 사회적기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코인스트리트는 30년이 지난 현재, 지역을 위한 책임과 기득권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떠안으며 또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막대한 수익금은 ‘초심을 잃었다’는 비난을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코인스트리트는 2008년부터 주민센터 주변 둔스트리트에 43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과 주민들이 이용할 실내수영장, 스포츠센터 등을 짓는 종합개발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중산층을 겨냥한 주택 300여채도 포함돼 있다. 주민 교육과 기반시설 확보에 수익을 썼던 데서 벗어나 영리를 추구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루이즈 킹 CSCB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지난달 19일 “주민과 지역이 필요로 하는 것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유연하게 수요를 조정하기는 하지만, 주민단체가 처음 결성됐을 때의 목적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킹 팀장은 “주민센터 내 공연장에서는 매월 마지막 금요일 지역의 영화제를 여는데 최근 같은 날 민간 임대수입을 벌 수 있는 요청이 들어와 고민을 할 때도 있었다. 가끔 수익과 자체적인 사용을 두고 우선순위가 상충될 때도 있다”고 전했다. 내적인 가치충돌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코인스트리트의 사업과 주택운영의 의사결정이 이사회를 통해 이뤄지는 만큼 주민들의 선택을 따라야 한다고 CSCB는 설명하지만 비영리 단체로 출발했던 시기에 지자체로부터 혜택을 받았던 만큼 사회적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런던광역시청은 1980년대 시장가격의 20% 수준도 안되는 헐값에 토지를 코인스트리트에 넘겼다. 임대주택도 2001년 이후로는 추가로 짓지 않고 있다. 특히 코인스트리트는 지자체가 가진 사회주택우선자 명단에서 임대주택 입주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 논의를 통해 정하기 때문에 장벽도 높다. 이 때문에 새로운 입주자는 1년에 1가구 수준이어서 기존 단체 구성원들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주민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만든 사회적기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코인스트리트는 30년이 지난 현재, 지역을 위한 책임과 기득권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떠안으며 또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도전하는 도시]슬럼화 극복한 ‘마을’ 케이프타운 카옐리샤·후쿠오카 야나가와
‘마을’은 규모의 경제로 해결할 수 없는 도시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쪽 끝에 있는 카옐리샤는 흑인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다. 케이프타운 외곽의 타운십(한국의 구와 비슷한 행정구역) 중 하나인 이곳의 주민 40만명 중 70%는 판잣집에 산다. 사망률이 매우 높아 인구의 75%가 35세 이하다. 젊은이의 4분의 1은 에이즈에 감염됐다. 케이프타운 최대 빈민촌이 있는 이 지역에는 마을을 지키는 농부들이 산다. 물을 얻으러 200m 이상 걸어야 하는 곳에서 농업은 사치같이 들린다. 하지만 이들의 농업은 마을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고향의 농부’라는 뜻의 시민단체 ‘아발리미 베제카야(Abalimi Bezekhaya)’는 1982년부터 빈민촌에서 텃밭농업 교육을 하고 있다. 이들이 텃밭운동을 시작한 것은 일자리가 없는 빈민들에게 살길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남아공은 농업대국이지만 급격히 산업화하면서 지역 공동체의 작은 농사일들이 없어졌다. 특히 인종분리 시기에 흑인 남성들이 도시와 광산의 노동자로 끌려가면서 농촌이 비게 됐다. 남아 있던 사람들도 일자리를 구하러 대도시로 나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부 도시 카옐리샤 중심의 공터에 만든 마을정원과 일본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 수로가 정비된 모습(왼쪽 사진부터). | 아발리미 베제카야 소식지·야나가와시 홈페이지
슬럼화된 도시 변두리에 남겨진 가족은 일하러 나간 식구가 돈을 보내오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다. 텃밭을 가꾸면 당장 먹거리가 생기고 남는 작물을 팔 수도 있다. ‘아발리미’의 도움으로 주민들은 버려진 국유지와 빈터에 토마토와 당근, 감자를 심었다. 모종을 다루고 퇴비를 만들며 땅을 고르는 방법도 배웠다. 작물은 지역 학교와 주민들 사이에서 팔려나간다. 마을이 생산지이자 시장이 된 것이다. 이런 풀뿌리 농업공동체는 매년 3000명의 소농을 배출하고 있다.
일본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후쿠오카(福岡)현 야나가와(柳川)는 도심에 60㎞에 달하는 수로가 있어 연간 120만명의 관광객을 모은다. 인구 8만명의 이 소도시는 주변 농어촌 마을과 수로로 이어져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가 야나가와 운하를 선진 관광 사례로 선전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곳은 개발논리에 사라질 뻔했던 물길을 주민들이 지켜내 도시를 되살린 대표적인 사례다. 1960년대 화학비료 사용이 늘면서 야나가와의 수로는 오염수로 가득 찼다. 모기가 들끓고 악취가 진동하자 콘크리트로 수로를 덮어 도로나 주차장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1977년 수로를 메워버리는 계획이 확정됐다.
하지만 도시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역 생태계와 밀접히 연결된 수로를 메우면 재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물길을 없애는 대신 되살리자는 주장에 힘이 실렸고, 시의회는 수로 준설과 오염수 관리로 방향을 틀었다. 주민들은 수로에서 고기를 잡고 헤엄치던 추억을 전하며 ‘물이 있는 삶’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년간 100차례 넘는 간담회를 열었고, 200개 주민모임이 수로를 71개 구간으로 나눠 각자 책임을 맡기로 했다. 주민들은 그 후 1년에 한 번씩 수문을 닫고 강바닥을 청소한다. 수향(水鄕) 야나가와는 이렇게 부활했다.
일본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후쿠오카(福岡)현 야나가와(柳川)는 도심에 60㎞에 달하는 수로가 있어 연간 120만명의 관광객을 모은다. 인구 8만명의 이 소도시는 주변 농어촌 마을과 수로로 이어져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가 야나가와 운하를 선진 관광 사례로 선전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곳은 개발논리에 사라질 뻔했던 물길을 주민들이 지켜내 도시를 되살린 대표적인 사례다. 1960년대 화학비료 사용이 늘면서 야나가와의 수로는 오염수로 가득 찼다. 모기가 들끓고 악취가 진동하자 콘크리트로 수로를 덮어 도로나 주차장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1977년 수로를 메워버리는 계획이 확정됐다.
하지만 도시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역 생태계와 밀접히 연결된 수로를 메우면 재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물길을 없애는 대신 되살리자는 주장에 힘이 실렸고, 시의회는 수로 준설과 오염수 관리로 방향을 틀었다. 주민들은 수로에서 고기를 잡고 헤엄치던 추억을 전하며 ‘물이 있는 삶’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년간 100차례 넘는 간담회를 열었고, 200개 주민모임이 수로를 71개 구간으로 나눠 각자 책임을 맡기로 했다. 주민들은 그 후 1년에 한 번씩 수문을 닫고 강바닥을 청소한다. 수향(水鄕) 야나가와는 이렇게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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