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외국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외부 접근이 통제됐던 용산기지의 숨겨진 역사가 책으로 나왔다.
용산구는 5일 과거 삼국시대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곳의 야이기를 남은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AD97~1953)>를 펴냈다고 밝혔다.
‘용산’(龍山)하면 흔히 미군기지와 삼각지, 용산역 일대(파란색 점선)로 생각하지만 용산의 명칭은 한양도성 서쪽 무악(서대문구의 안산)의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한강변 쪽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모양이 용의 몸통과 비슷하다는 데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용산은 용산구 효창공원 일대와 원효로 서쪽 일대의 구릉지까지다.
1861년 대동여지도 경조오부(京兆五部)에 보이는 예전의 용산(빨강색 점선)과 현재 용산(파란색 점선). 용산구 제공
현재의 용산기지 인근은 조선시대 둔지산(屯之山) 일대 얕은 구릉과 넓은 모래사장으로 매년 한강이 범람하는 지역이었다.
남산과 한강을 앞에 두고 최적의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용산기지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육로와 뱃길이 모이는 곳이었다. 도성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현대사에서 이 같은 이점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은 일본군이었다고 책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한양을 함락한 뒤 용산기지를 자신들의 병참기지로 사용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도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화를 위한 대륙침략 기지로 용산을 택했다.
기지 안에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시설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용산 아방궁’이다. 조선총독이 거주하며 집무를 보고, 연회도 열었던 용산총독관저다.
일본지리풍속대계 16권(上)에 실린 용산 아방궁 일대의 전경. 용산구 제공
두번째 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러일전쟁 후 남은 군비로 유럽식 초호화 건축물을 건설했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돼 현재 121병원이 자리잡고 있다. 2차 대전 말에는 미군의 공습을 빨리 피하기 위해 용산총독관저와 조선군 사령부 청사를 연결하는 지하 벙커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청나라 군대도 용산기지 일대에 주둔하기도 했다.
일제가 만주 사변에서 숨진 일본군들을 추모하며 세운 충혼비가 기지 내 남아있는데 지금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미군 전사자들을 기리는 비석으로 사용 중이다.
일제시대 만주사변 충혼비(왼쪽)와 용산기지 내 미8군 전몰자 기념비. 용산구 제공
이 책은 러일전쟁 이전과 이후 용산 기지의 탄생 과정과 기지 내 부대 등 시설, 한국전쟁과 용산 기지 등 총 11장으로 구성됐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미군기지의 공원화가 가시화된 시점에서 여러가지 선행 연구 결과가 담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공원 조성에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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