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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 사망… 애도와 냉담 사이, 영원히 멈춘 ‘중동 불도저’

by bomida 2014. 1. 12.

ㆍ“영웅” “학살자” 극과 극의 평가

ㆍ이·팔 분리정책 장본인… 평화협상 추진 중 쓰러져 8년 투병

중동의 불도저, 베이루트의 학살자.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든다’는 악명만큼이나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가 오랜 투병 끝에 타계했다. 향년 85세. 이미 8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정치적 생명은 끝났지만, 그가 남긴 행적은 사망 후에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낳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1일 “샤론 전 총리가 텔아비브 부근의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며 “이스라엘 국민은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일간 하레츠는 샤론의 시신이 12일 국회에 안치돼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고, 다음날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아내가 묻힌 네게브 사막 인근에 영면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샤론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지도자였다”며 애도했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스라엘이 중요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랍권은 “샤론을 심판하지 못했다”며 냉담한 반응을 내놨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행복하다”고 밝혔고, 파타당은 “야세르 아라파트의 암살자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웠어야 했다”고 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 역시 대학살을 저지른 샤론을 정의의 심판대에 올리지 못한 데 유감을 표명했다.

이 같은 차이는 팔레스타인 점령을 필두로 한 그의 정책에 대한 엇갈린 평가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매파인 샤론은 자국에서는 전쟁영웅이었지만 아랍권에서는 극악한 전쟁범죄자로 여겨졌다. 1928년 영국 위임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샤론은 열 네살에 유대인 군사조직 하가나에 들어갔다. 이후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발발한 중동전쟁에 참여했고 1967년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시리아를 차례로 침공하며 공을 세웠다.

26년 전 아라파트와 샤론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왼쪽)과 당시 외무장관이던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가 1998년 미국의 중재로 미 메릴랜드주 와이에서 열린 평화회담에 참석해 마주보고 있다. 와이 | AP연합뉴스


1982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와해시키기 위해 근거지였던 레바논 베이루트 공격을 감행했다. 이스라엘 동맹군인 레바논 기독교민병대가 베이루트 인근 팔레스타인 난민촌 두 곳에서 학살을 저질렀는데 당시 국방장관이던 샤론은 최대 3500명이 사망한 이 학살을 묵인한 죄로 결국 사임해야 했다. 그는 이스라엘 점령촌(유대인 정착촌)으로 팔레스타인을 몰아내는 정책을 구상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77년 농림장관일 때 동예루살렘·요르단강 서안지구·가자지구에 유대인 마을을 만든다는 ‘샤론 계획’을 구상했고, 1980년대에는 주택장관·국가기간시설장관 등을 지내며 정착촌 건설을 강행해 팔레스타인 땅을 조각내고 주민들의 삶을 파괴했다. 야당 정치인이었던 2000년에는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알아크사 모스크를 방문, 2차 인티파타(팔레스타인인 봉기)를 촉발시켰다. 극도의 대립을 초래한 뒤 샤론은 우익 리쿠드당을 이끌며 집권했다.

그렇게 총리가 된 샤론은 쓰러지기 직전에 자신이 만든 점령촌들을 철거하며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하려 했다. 2005년 서안·가자지구의 25개 점령촌을 없애고 가자지구에 40년간 주둔시켰던 군대도 철수하겠다고 밝혀 유대 극우파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 분석가 나딤 셰하디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지지부진한 싸움에 위협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샤론은 결자해지를 이뤄내지 못한 채 2006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8년간 코마 상태에 있다가 논란 많은 삶을 뒤로한 채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