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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할퀴고 간 ‘타클로반의 눈물’

by bomida 2013. 12. 5.

태풍이 타클로반의 삶을 휩쓸고 간 지 한 달 만에 필리핀 교육부는 이 곳 학교들의 문을 연다고 밝혔다.


필리핀 타클로반 시티는 올해 전 세계에서 발생한 태풍 중 가장 강력했던 하이옌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 ‘슈퍼태풍’은 순간 시속이 379㎞로 역사상 최강 위력을 기록했다.

타클로반이 주도인 레이테섬과 위쪽 사마르섬 사이 산후아니코 해협면에 접한 이 곳은 태풍에 익숙하다. 한 해에 태평양에서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태풍 20여개가 좁은 산후아니코 해협을 통로 삼아 지나간다. 하이옌은 레이테섬과 사마르섬, 세부섬 전반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길목에 선 타클로반의 상처는 가장 깊다. 22만명의 도시에서 1만명이 사망했다.

시신 수습 못해 노상에 방치
11월 8일 하이옌이 상륙하고 사흘이 지난 11일, 세부로 향했다. 타클로반 다니엘 로무알데스 공항은 세부 막탄 공항에서 40분이면 닿는다. 수도 마닐라에서도 수시로 비행편이 있다. 그러나 태풍이 공항 건물을 쓸고 내려가면서 항공노선은 끊긴 상태였다. 미군이 구호물자와 인력을 실어 나르는 군용기를 얻어 타고 12일 타클로반에 들어갔다.

11월 14일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에서 주민들이 필리핀 군용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김보미 기자

하이옌에 이어 또다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 ‘소라이다’가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던 타클로반은 초토화돼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인근 산호세로 향했다. 해수면과 맞먹는 저지대에 위치한 이 마을은 태풍으로 바닷물이 쓰나미처럼 덮치면서 성한 집이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만 사망자가 1000명 이상 나올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수였던 야자수는 뿌리째 뽑혔고, 쓰러진 집 위로는 차들이 얹혀 있다. 전신주들이 쓰러지면서 끊어진 전선들이 뒤엉켰는데 도시 전체 전력공급이 마비돼 감전의 위험이 없다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주택가 상황은 더 참담했다. 길가를 따라 무너진 집터 안 곳곳에는 얇은 판자나 천으로 덮인 시신들이 놓여 있다.

작은 동네라 죽은이가 누구인지 주민들 모두 알고 있지만 신원을 확인해도 이들을 묻을 곳도, 장비도 없다. 시신 수습용 가방도 모자라 노상에서 비를 맞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물들의 사체는 한쪽에 그득하게 쌓여 있기도 했다.

더운 날씨가 1년 내내 이어지는 타클로반의 가옥들은 대부분 나무로 기둥과 벽면을 세우고 합판으로 지붕을 올린다. 그래서 태풍에 집들은 말 그대로 날아갔다. 특히 합판 등 주택 자재들은 강속의 바람에 실려 또다른 피해를 냈다. 날카로운 모서리는 발사된 무기와 같았던 것이다.

공항 청사 안에 아기를 안고 있던 세실 페츠(32)의 12살짜리 조카는 철판에 머리를 맞아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시청에서 만난 세 아이의 젊은 아빠 로드니 모르테가(22)는 막내딸을 잃었다. 태풍을 피해 집을 나오다가 아이를 안고 있던 여동생이 자신에게 아이를 넘겨주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쇠기둥이 두 사람의 팔을 강타했고, 아이는 불어난 물속으로 휩쓸린 것이다.

“부자들은 태풍 전에 모두 떠났다”
이곳에 머무른 나흘간 만났던 이들은 살기 위해 사투 중이었다. 취재를 위해 묶었던 숙소가 있던 사마르섬에서 레이테로 들어가는 산후아니코 대교를 지나 1㎞ 정도 더 들어오면 타클로반 시티의 초입인테, 여기서부터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도시를 덮고 있다.

필리핀 타클로반 시티에 불어닥친 슈퍼태풍 하이옌에서 살아남은 주민이 부서진 합판 조각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대다수의 주민들은 악취를 견디지 못해 손수건이나 옷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아이들도 옷소매로 코를 막고 거리를 걷는다. 냄새는 차치하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초기 방역이 필수적이지만, 마을에 있던 트럭 상당수가 태풍에 휩쓸리면서 소독차를 구하지 못해 시 당국은 일주일이 다 되도록 손을 놓고 있었다.

물자수송이 막혀 식품과 식수도 귀했다. 세계식량기금이 수시로 나눠주는 구호 비스킷으로 허기를 채우는 수준이다. 한 봉지에 400㎉가 넘는 고열량 과자다. 날이 지날수록 육로가 정리되면서 고기와 음료수를 파는 노점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식재료 가게들의 정상화는 먼 이야기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필리핀 내 150만명의 어린이가 극심한 영양실조 위험에 놓였고, 임신부 80만명이 당장 영양분 섭취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폐허가 된 지역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은 공항과 항구로 몰려들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흘째부터 민간항공 운항이 부분적으로 재개했다. 부서진 공항 건물 안에서 필리핀항공과 세부퍼시픽 직원들은 손으로 쓴 항공권을 팔기 시작했다. 

하루 두 편에 그쳤던 필리핀·세부행 항공편은 일주일이 지나자 8편 정도로 늘었다. 항공표를 살 수 없는 이들은 수시로 뜨는 필리핀과 외국 군용기가 ‘동아줄’이다.

공항 바깥부터 활주로 안까지 장사진을 이룬 이들은 줄의 순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자리를 뜨지 못하고 기다렸다. 30도가 넘는 한낮 뙤약볕에도 아이들은 부모 곁에서 우산을 쓰고 앉아 있다. 전기가 없어 오후 6시쯤 해가 지면 칠흑과 같은 어둠이 내리는 공항에는 밤새 갓난쟁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공항까지 온 이들은 상황이 좋은 편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교외에 있고, 나가서 생활할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주민들은 무너진 집터에서 복구가 되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11월 12일 필리핀 타클로반 시티 산호세 주택가에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부서진 주택 잔해들이 뒤엉켜 있다. | 김보미 기자

하이옌으로 애초에 ‘폭풍해일’ 대신 ‘쓰나미’가 올 것이라고 예보했다면 희생자를 줄였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공무원들이 위험성을 간과해 준비가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주민들은 “부자들은 모두 태풍 전에 이곳을 떠났다”고 했다. 타클로반에 지국을 둔 라디오 방송 진행자와 PD 등도 목숨을 잃었는데, 이들 역시 태풍 전 가족들을 모두 마을 밖으로 대피시켜 화를 면했다고 필리핀 언론들이 전했다.

정부 부패 만연 구호자금 횡령 우려
미국과 말레이시아·한국·일본 등이 수송을 위한 군용기를 보내고 호주·독일·헝기리 등이 의료진을 급파하는 등 국제사회의 구호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도시를 뒤덮은 잔해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지만 속도는 더디다. 여기에 필리핀 정부의 무능이 한몫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주정부와 시정부는 구호 주체를 두고 공방하며 알력 싸움을 벌였다.

정부 부패가 만연한 필리핀에서는 외국 구호자금과 물자들이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11월 14일 ‘사망자 과장설’을 주장하며 많아야 2500명이라고 주장했지만, 국가재해위기관리위원회는 27일 사마르·레이테 등 중부에서 5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757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유엔은 총 사망자가 1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부상자도 2만6000여명에 이른다. 100만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돼 400만명이 집을 잃었다. 필리핀 공공사업도로부는 태풍이 지나간 지 보름이 지난 26일에서야 피해지역에 116개 합숙소를 짓기로 했다. 한 채당 24가구 정도가 수용될 수 있는 공간이다.

태풍이 타클로반의 삶을 휩쓸고 간 지 한 달 만에 필리핀 교육부는 이 곳 학교들의 문을 연다고 밝혔다. 12월 2일부터 아이들은 다시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할 것이다. 도시의 희망이 될 아이들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다행이지만 태풍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자리에 빈 자리가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