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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넋 잃은 필리핀’ 4신] 태풍 일주일 만에 구호 시작… 보호자 없는 시신 매장

by bomida 2013. 11. 15.

필리핀 레이테섬의 타클로반 시청 직원들은 매일 출근부에 직접 이름을 적고 있다. 원래 직원은 800명 정도이지만 14일 출근부에 이름을 올린 이는 46명이었다. 출근하지 못한 사람들은 슈퍼태풍 하이옌 피해자들이다. 

출근한 직원들은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의약품과 식료품 수급상황을 점검하고, 시내 곳곳의 간이 치료소에서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전염병 예방주사를 놓아주고 있었다. 일부는 간이 천막에서 약품을 나눠주고 시청 소유 트럭에서도 진료를 한다. 한 직원은 “우리 직원들도 똑같이 피해를 봤다. 먹을 게 없고 물도 없다. 가족이 굶고 있어서 못 나오는 사람들도 있고, 교통수단이 없어 출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필리핀 타클로반 주민들이 지난 13일 시청 안에서 길게 줄을 서 있다. 전기 발전기와 연결된 충전기와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다. 몇시간씩 기달려 간신히 차례가 돌아오지만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고 컴퓨터로 트위터, 페이스북에 접속해 타지에 있는 지인들에게 생사를 알릴 수 있다.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도 없다”는 타클로반 주민들의 애달픈 호소는 이날도 이어졌다. 기자 역시 이틀간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시신과 동물 사체 썩는 냄새 때문에 하루 종일 극심한 두통에 시달린 탓도 있고, 타클로반 시내에서는 먹을거리도 음식을 구할 곳도 없기 때문이다. 전날 머물렀던 레이테섬 북쪽의 사마르섬은 그나마 사정이 나아 먹을 것이라도 있었지만 전기는 수시로 끊어졌다. 타클로반에 있는 동안에는 기사 전송도 휴대전화 카카오톡으로 해야 했다.

눈물 흘리는 ‘모정’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폐허가 된 필리핀 타클로반을 빠져나가기 위해 14일 공항에서 군 수송기에 탑승할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던 한 여성이 군인에게 남편을 대기줄 순서 맨 앞에 세워달라고 울면서 애원하고 있다. 여성의 품에는 분유를 먹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다. 타클로반 | AP연합뉴스


▲ 타클로반 시청 직원 800명… 피해자 많아 46명만 출근
시신 훼손 신원확인 못해
수송기 이착륙 공간 부족 구호품 쌓아놓고 발동동


시청 근처 세인트폴 병원은 타클로반 시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병원이다. 1층에 간이 침상 5개가 있지만 치료를 기다리는 사람들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다리가 부러진 이들이나 심전도 검사가 필요한 중증 환자들만 응급조치를 받는 형편이었다. 벤저민 파르디야(41)는 이날 아내 로웨나(33)를 데리고 걸어서 겨우 병원까지 왔다. 아내는 태풍에 날아온 나무에 머리를 맞았다. 눈동자는 풀려 있고,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다고 했다. 뇌진탕 증상을 보이고 있지만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영양제 주사를 놓아주는 것밖에 없었다. 


이들 부부는 이번 태풍으로 네 자녀 중 가장 어린 15개월 된 아기를 잃었다. 여덟 살 큰아이도 잘 걷지 못해 치료가 필요하지만 엄마가 아프니 돌봐줄 수가 없다. 시내 영필드 지역에 있는 이들의 집은 태풍에 모두 쓸려갔다. 알프레도 로무알데스 시장이 전날 주민 대피령을 내렸으나 달리 갈 곳이 없다. 

“가진 게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아내는 빨리 마닐라의 큰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파르디야는 “당신네 정부에라도 좀 부탁해달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소연했다.

유일하게 남은 병원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다친 필리핀 타클로반 주민들이 14일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세인트폴 병원 1층 간이 병상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다.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재난이 남긴 가장 큰 문제는 시신을 수습하는 일인 듯했다. 실종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애타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시신이 너무 훼손돼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시신에서 유전자를 추출해 검사하려면 1구당 1만5000페소(약 38만원)가 들어가기 때문에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필리핀스타 등 현지 언론들은 시신들을 수습해 담는 가방조차 바닥났다고 보도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은 “사망자는 최대 2500명”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이날 현재 필리핀 정부가 공식 확인한 사망자 수만 2400명을 넘어섰다.

타클로반 시 당국은 지난 13일부터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은 시신들을 집단매장하기 시작했다. 당국은 검은색 가방에 담긴 희생자 시신 150구를 팔로 마을에 있는 교회 주변에 묻었다. 14일에도 30구를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일부 주민들은 건물 잔해 등에 남아 있던 시신들을 도로변에 옮겨놨다. 당국에서 가져가 묻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둘러 매장하면 사망자들의 신원을 영영 확인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필리핀 보건부에 ‘재난상황 시 시신 처리 매뉴얼’을 전달하며 이런 집단매장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슈퍼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통과한지 일주일이 지난 14일 필리핀 타클로반 시티 산호세 지역에는 곳곳에 물 배급차가 배치되고(위 사진) 간이 진료소도 설치됐다.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그래도 나아진 것이 있다면, 이날부터 구호 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재난 일주일째를 맞아 타클로반 도심에는 조금씩 외부 물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점상이 고기를 팔거나 음료수를 판매하는 모습이 보였다. 곳곳에 마련된 배급소에서 적은 양이나마 쌀을 나눠준다. 하지만 자동차 기름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주민들은 주유소에서 급유기를 들어내고 밑에 저장돼 있는 기름을 퍼가고 있다. 이마저도 긴 줄을 기다려야 순서가 온다. 어떻게 구했는지 크기가 제각각인 통들에 기름을 담아놓고 파는 신종 노점상들도 눈에 띄었다.

군, 필리핀에 구호물품 전달 군 관계자들이 14일 새벽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태풍 피해를 입은 필리핀 타클로반으로 보낼 구호물품들을 군 수송기에 싣고 있다. 군 수송기 2대는 필리핀에서 요청한 담요·텐트·위생키트·정수제·비상식량 등 20t가량의 물품을 싣고 이날 새벽 6시 필리핀을 향해 떠났다. | 사진공동취재단


필리핀 주둔 미군, 말레이시아·독일·일본군 수송기와 긴급 파견병력이 타클로반에 도착했고, 국제 구호활동을 하는 비정부기구(NGO) 11곳 관계자들이 타클로반 시청에서 유엔과 회의하며 업무를 조율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구호품이 원활히 전달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공항에 있다. 물품·인력수송기들이 이착륙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최대 4대 정도가 뜨고 내릴 수 있는 정도여서 수송기들은 인근 세부 공항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가장 먼저 필리핀에 달려왔지만 지난 9일부터 세부 공항에 물품을 쌓아놓은 채 발만 구르고 있다.


한국 정부도 14일 군 수송기를 보냈으나 역시 세부에서 날개가 묶였다. 현지에서 거주 혹은 단기 체류하면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교민 17명과 취재진 등 30여명은 수송기가 타클로반에 와 짐을 내리면 빈 수송기를 타고 세부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릴 곳을 찾지 못해 하늘을 맴돌던 수송기는 기름이 떨어져 결국 저녁 무렵 세부로 돌아갔다. 시내에는 이미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교민들과 기자는 어쩔 수 없이 무너진 공항 한쪽에 있는 간이 천막에서 밤을 보냈다. 낮 동안 비스킷과 바나나를 먹었을 뿐이고, 침낭도 의자도 없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호사다. 배낭 속엔 덮을 옷가지가 있고 옆에 물이라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