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넋 잃은 필리핀’ 6신]“3일 밤낮 줄서서 군 수송기 타기만 기다려”

by bomida 2013. 11. 17.

필리핀 중부 레이테섬 중심 도시 타클로반의 다니엘 로무알데스 공항은 슈퍼태풍 하이옌 취재를 위해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인 동시에 간절히 빠져나가고 싶은 곳이었다. 이는 타클로반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2층짜리 공항 청사와 주변 시설은 하이옌으로 모두 초토화됐지만 관제탑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해가 지면 칠흑 같은 어둠이 공항을 뒤덮지만 관제탑은 발전기를 돌려 불빛을 밝힌다. 구호물자와 장비, 인력들이 오고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항 안팎은 항상 수백명의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의 관제탑.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태풍 발생 8일째인 지난 15일에도 무너진 건물 밖에는 항공권을 구하려는 줄이 길게 이어졌다. 세부나 마닐라로 가는 필리핀항공이나 세부퍼시픽 등 민간항공기를 예약하려는 인파다. 태풍으로 끊긴 항공편은 차츰 정상화돼 하루 8편 정도가 마닐라나 세부로 향한다. 그러나 항공기 좌석이 한 편당 70석 정도밖에 되지 않아 티켓이 풀리자마자 동이 난다. 공항 안에는 컴퓨터와 통신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항공사 직원이 손으로 쓴 항공권을 판매한다. 며칠씩 줄을 서야 간신히 가족 한두명이 나갈 수 있는 표를 구한다.

지난 14일 필리핀 레이테섬의 타클로반 공항에 필리핀군 수송기가 도착하자 섬을 탈출하려는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 생수·비스킷으로 버티며 대기
민간항공기 운행 수 늘었지만
며칠씩 줄서야 한두 좌석 가능


▲ 지붕·배수시설 없는 화장실
스콜에 오물 퍼져 악취 진동


항공표를 살 여유가 없는 이들은 군수송기로 탈출하기 위해 줄을 선다. 돈 없는 이들이 타클로반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군수송기 대기줄은 활주로 안에서부터 공항 밖까지 500m 넘게 이어져 있다. 많게는 8~10명의 식구들이 가끔씩 몰아치는 스콜과 한낮의 땡볕을 견디며 앉아 있다. 줄을 서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잠도 잔다. 오전 10시30분쯤 공항 내 군인들이 생수와 구호 비스킷을 나눠줬지만 이 많은 인파들에게 고루 배분되기에는 적은 양이다. 500㎖ 물병 3개를 받은 리키 블라가올라(43)는 3일째 공항에서 식구들과 숙식하고 있다. 아내와 세 아이, 조카 내외와 자녀 등 14명이 군용기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공짜로 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마닐라에 사는 남동생에게 가야 살 수 있다. 이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년은 넘게 있다 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에서 군인들이 나눠주는 구호비스킷을 받기 위해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물과 비스킷은 공항 바깥쪽(맨 위)과 내부(중간)에서 수시로 배급된다. 공항 안에는 간단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임시 진료소 간이 천막 밑에 차려져 있다. 군용기와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맨 아래)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블라가올라 가족은 그래도 활주로 안쪽까지 들어와 있다. 군인들이 활주로로 들어오는 문을 통제하며 비행기를 타고 나간 사람 인원수만큼 안쪽으로 들여보낸다. 이 줄이 짧아져야 공항 밖의 사람들이 안으로 또 들어올 수 있다. 활주로 안 경쟁도 치열하다. 지난 14일 오후 10시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교민 11명이 미 군용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인근 대기줄에서 동요가 일었다. 외국 군용기를 기다리던 맨 앞줄 사람들에게 교민 뒤쪽으로 줄을 서도록 하는 순간 대열이 일제히 무너지더니 백여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50여명이 한국 교민들과 함께 이날 자정 마닐라로 떠났다. 날이 밝자 군인들은 임산부와 노약자, 당장 수술이 필요한 사람들을 먼저 군용기에 태우기 위해 가장 앞줄에 세웠다. 헝가리 의료진이 작은 천보자기에 싼 신생아와 엄마를 데리고 왔다. 태어난 지 이제 6일 된, 몸무게가 1.5㎏밖에 되지 않는 미숙아였다. 당장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아이와 엄마는 다음 도착하는 군용기 편으로 마닐라 병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벨기에 의료팀이 생후 6일된 아이를 안고 있다. 아이와 엄마는 군용기를 통해 마닐라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폐허가 된 공항 안에 이날 간이화장실 한 곳이 설치됐으나 지붕도 없고 배수시설도 없는 부서진 화장실 역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여자화장실은 군인들이 문을 대신해 천조각을 대주기는 하지만 악취를 피할 길이 없다. 더욱이 하루에도 몇번씩 쏟아지는 스콜 때문에 오물이 공항 전체로 퍼지면서 악취가 진동한다. 그래도 이 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타클로반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갈 곳도, 떠날 여력도 없어 형체도 없이 부서진 집에 남아 수시로 나눠주는 구호비스킷을 받으러 공항 밖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