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굶주린 이재민 수천명, 정부 구호식량 창고 습격 쌀 빼내가
13일 오전 10시20분쯤 필리핀 사마르섬에서 레이테섬에 있는 타클로반으로 가기 위해 두 섬을 잇는 산후아니코 대교로 향했다. 타클로반 시가지 초입,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사람들이 시내 반대편으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은 여성들, 가족을 이끄는 남성들 할 것 없이 집 밖 거리로 뛰쳐나왔다. 지나가는 차들을 무조건 세워 타려고 안간힘을 썼다.
몸이 아파 거동이 힘든 사람도 억지로 붙들고, 다리를 건너자며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하의만 입었을 뿐 윗도리도 다 입지 못한 여자아이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울면서 뛰었다. 아이들 둘을 오토바이에 태워 다리 건너편에 데려다 놓은 한 남성은 남은 가족들을 데리러 다시 다리를 건넜다. 혼돈 그 자체였다.
총성이 들린 곳은 다리에서 타클로반 시내 쪽으로 800m 떨어진 지점이라고 했다. 이날 오전 9시쯤 교도소를 탈출한 죄수 40여명이 먹을 것을 찾아 약탈을 하며 시민들을 공격하면서 교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전날부터 필리핀 방송들은 타클로반 시내에 있는 교도소에 먹을 것이 끊겼으며, 배고픔과 가족들 걱정에 분노한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탈출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했다.
▲ 시장은 주민들에 ‘대피령’
사망자 수 줄여서 발표하는 아키노 대통령에 불만 늘어
탈옥한 수감자들은 총과 칼을 가지고 시민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 1명 이상이 칼에 찔려 숨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지난 11일부터 약탈을 막기 위해 시내 곳곳에 배치돼 있던 군인들은 타클로반으로 들어가는 길목들을 차단했다. 필리핀에서는 이전부터 남부 섬들에서 소수 부족이나 무슬림 반군과 정부군 간 교전이 벌어지곤 했지만,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식료품 공급마저 끊기고 치안이 나빠진 지금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다리 끝에 서 있던 레지 아프라는 “가족들이 시내에 있는데 군인들이 통제하고 있고, 너무 위험하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죄수들 혹은 반군들이 군인들의 무기를 훔치려고 한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시민 로레나 가마나는 “토요일에 죄수들이 풀려났다고 들었다. 그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군들과 결합한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옆에 있던 준 티우는 “반군들도 죄수들도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는 ‘신인민군’이라는 이름의 반군조직이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는데, 태풍 여파로 수감자들이 풀려나면서 ‘반군화’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몇몇 주민들은 “반군이라기보다는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 측은 이미 폭동이 진압됐다고 주장했고, 산후아니코 다리의 상황은 오후가 되면서 진정됐다. 하지만 이미 타클로반에서는 약탈이 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런 우려가 곧 현실이 될 것만 같다.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기도 물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기자가 머무는 호텔도 지난 밤사이 전기가 끊겼다.
필리핀 타클로반 산호세 지역에 한 주유소에서 주민들이 주유소 지하 저장창고의 기름을 빼내기 위해 몰려있다. 타클로반 | 김보미 기자
마닐라 GMA방송에 따르면 지난 12일에는 굶주린 이재민 수천명이 타클로반 시내에 있는 정부 구호식량 창고를 습격해 쌀을 약탈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창고 벽이 무너져 이재민 8명이 압사했다. 창고 주변에 군과 경찰이 있었다지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태풍이 가장 먼저 상륙했던 레이테 부근 기우안 섬은 ‘열대의 파라다이스’라 불렸다는데, 지금은 태풍에 휩쓸려나가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서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이라고 외신들이 전했다. 당국은 이재민들의 약탈을 막기 위해 발포령까지 내렸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치솟고 있다. 그런데도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계속 피해 규모를 줄이려는 데 급급하고 있다. 아키노 대통령은 12일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사망자 수가 1만명이라 보는 것은 너무 많다, 2000~2500명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엔은 사망자가 1만5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유엔에서는 이번 태풍으로 필리핀 국내총생산(GDP)의 5%인 6040억페소(약 15조원)가 날아갔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가 인프라 복구를 위해 책정한 재원은 현재 230억페소(564억원)에 불과하다.
유엔이 구호본부를 설치한 타클로반 시청으로 갔다. 예상과 달리 구호품을 나눠주는 곳은 없었고, 인터넷 접속이 된다는 말에 ‘생존 소식을 바깥세상에 알리러 온’ 주민들만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유엔 소속 119 국제구조대로 파견된 김용상 대원을 만났다. 한국 정부의 현지 지원에 앞서 사전조사차 나왔다고 했다. 그는 “방역도 안되고 물도 없다”는 말부터 꺼냈다. 앞서 발레리 아모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국장은 “필리핀 구호에 3억100만달러(약 3200억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각국이 지원을 약속했지만 목표액에 턱없이 못 미친다. 김 대원은 그나마도 지원 ‘약속’일 뿐, 아직 현장에 들어오는 물품과 돈이 없다고 했다. “세계 경제가 안 좋아서 그런지, 캐나다나 유럽에서도 정부 차원의 지원 담당자들이 오지 않았다.”
벌써 재난이 일어난 지 엿새째인데 구호작업은 진전이 없다. 김 대원은 “타클로반 시 당국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다”고 했다. 필리핀 정부는 거의 대응을 못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유엔은 사나흘만 지나면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대원은 재작년 일본 3·11 대지진 현장 등 세계 여러 곳의 재난현장에 다녀봤다. 그는 일본 지진 때보다 지금의 필리핀 상황이 더 나쁘다고 했다. “시신들이 아직 다 수습되지 못한 것은, 냉동시설도 없고 매장도 못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누가 누구인지, 누가 희생됐는지 다 알고 있으니 ‘나중에 매장하겠다’며 그냥 두고 있는데, 묻을 곳조차 마땅치 않다.”
유엔 소속 119 국제구조대 김용상 대원 타클로반 | 김보미기자
타클로반은 국가 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통제권이 중앙정부로 넘어갔지만,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키노보다는 차라리 시장에게 통제권을 다시 돌려주는 편이 낫다”고 말하고 있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알프레도 로무알데스 타클로반 시장은 13일 주민들에게 “다른 도시로 탈출하라, 친척들이 있다면 그 지역으로 가라”며 대피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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