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직전, 여동생에 안긴 아기 급류에 휩쓸려 가… 그게 마지막”
“아무 것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곳의 소식을 세상에 알려달라.”
태풍에 강타당한 필리핀 레이테섬 타클로반 시청 한쪽에는 간단한 치료 센터가 마련돼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터넷에 접속해 주변 사람들에게 생사를 알리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13일 오후 시청을 찾아간 기자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스물두살의 로드니 모르테가였다.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라는 말에, 그는 다짜고자 “고맙다”고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이 곳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했다.
젊은 나이지만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이번 태풍에 막내딸을 잃었다. 지난 9월에 태어난, 생후 2달도 채 안 된 갓난아기였다. 태풍이 몰아치던 지난 8일 모르테가와 11명의 식구들은 물이 차들어오자 집에서 도망치려고 짐을 꾸렸다. 하지만 강가에 있던 집 안으로 미처 탈출할 시간도 없이 물이 밀려들어왔다.
아기는 그의 여동생이 안고 있었다. 집을 떠나려는 순간, 태풍에 금속 막대기가 날아와 여동생과 그를 때렸다. 아기는 여동생의 팔에서 떨어져, 급류에 휩쓸렸다. 막둥이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모르테가의 팔에는 그 때 입은 상처가 선명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더 큰 상처는 가슴에 남았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아무 도움을 못 줘 미안하다는 말에도 그는 “고맙다”며 이곳의 모습을 알려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모르테가는 오는 16일에는 태어나 자란 마을을 떠나 다른 섬으로 갈 생각이다.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고, 아픈 기억을 안고 살기도 괴롭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누군가 계속 문을 두드린다. 열어보면 음식 좀 달라. 제발 물이라도 달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줄 것도 없고, 나와 아이들이 먹을 것도 없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른다. 아직까지 정부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있다. 먹을 것과 물이라도 달라고 시청에 찾아가 애원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래도 다른 가족이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이제 어떻게든 아내, 세살배기 딸과 두살 아들과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 그는 “지금 필요한 것은 음식과 마실 물”이라며 다시 도움을 호소했다.
“돌 지난 아기가 하루종일 썩는 냄새를 맡고 있다. 어떻게든 여기를 나가고 싶지만 나간들 어디로 가야할지….”
세실 페츠(32)는 지난달 첫돌을 맞은 아들을 데리고 13일 아침부터 필리핀 레이테섬의 타클로반 공항에 나와 앉아있다. 섬 밖으로 나가는 비행기편을 예약할 수 있을까 해서다.
타클로반 시내에 있는 집은 다행히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지만 살림살이들이 슈퍼태풍 하이옌과 함께 들이닥친 물살에 떠내려갔다. 열두살짜리 조카는 물에 떠내려온 무언가에 이마를 부딪쳐,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었다. 남은 가족들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태풍이 지나간 지 엿새째, 이웃들은 대부분 걸어서 혹은 차를 타고 타클로반을 떠났다. 운 좋게 비행편을 구해 섬을 벗어난 이들도 있었다.
세실은 부모님과 남편을 남겨둔 채 아들을 안고 매일 공항으로 나오고 있다. 더위 속에 하염없이 표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아이가 자꾸 썩는 냄새를 맡으니 아플까봐 걱정이다. 어떻게든 나가야 할텐데….” 우선 이웃한 세부로 갈 생각이지만, 그곳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앞길이 막막하다. 타클로반에서 나고 자란 세실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산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엔지니어인 남편은 이 와중에도 일을 해 돈을 벌어야 한다며 우선 세실과 아이만 떠나라 했다. 부모님도 여기 남아 집을 지키겠다고 한다. “누군가는 고향을 지키며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세실은 “아기 우유를 살 곳이 없다는 게 타클로반에서 나가려는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집에 남아있던 분유를 조금씩 나눠 타서 먹이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지 알 수 없다. 지금 나가면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세실은 “여길 보라”며 주변을 가리켰다. “다 쓸어갔다.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게 변했다.” 하지만 세실은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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