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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나지 않는 칠레의 과거사 청산, 이번엔 피노체트 호위병 유족들 '소송'

by bomida 2013. 10. 23.

피노체트 호위병 유족, 공산당 상대 소송

ㆍ칠레, 내달 대선 앞두고 ‘독재정권의 반격’ 눈길

1986년 9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 인근 카혼 델 마이포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 악명 높았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향한 좌파 조직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암살은 미수로 끝났고, 산악지대에서 5분간 이뤄졌던 급습에 피노체트를 호위하던 군인 4명과 경비병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11명이 다쳤다. 피노체트는 이 공격을 빌미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허용하는 조치를 내린다. 피노체트는 희생된 호위대의 추모식을 매년 성대하게 열고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이 다 돼 가는 시점에서 당시 희생자들의 부인들이 법적 소송에 들어갔다. 사망한 군인 5명 중 3명이 기예르모 티예이르 공산당 대표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해 살인 혐의로 제소한 것이다. 당시 공격은 애국전선과 공산당의 합작이었고 가해자는 응당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난 9월10일(현지시간) 열린 피노체트 쿠데타 40년 기념식에서 독재 정권 시절 

사망하거나 실종된 이들의 가족들이 희생자 사진을 들고 있다. 11월 대선에 좌파연합 후보로 출마하는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맨 앞줄 왼쪽 세번째)도 한 여성의 사진을 들고 있다. /reuters



당시 남편을 잃은 베로니카 발레호스는 22일 “법에 앞서 우리는 정의와 평등을 원한다. 그게 전부다”라고 말했다. 소송은 올 4월 티예이르와 현지 일간 라테르세라의 인터뷰가 단서가 됐다. 그는 “공산당이 피노체트 암살 시도에 합류했고, 1980년대에 다른 무장공격도 했다”고 고백했다. 티예이르는 “정부의 억압에 대한 대응일 뿐이었다”고 했지만 군사독재에 맞서면서 공산당 역시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일었다. 스페인 통신 EFE에 따르면 1973~1990년 피노체트 정권 기간 3명의 공산당 지도자가 비밀경찰에 희생됐고 군인 400명도 죽거나 실종됐다. 

지금까지의 과거사 진상규명은 주로 피노체트 정권의 범죄를 밝혀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 소송은 그 반대편에 있는 피노체트 주변에서 제기한 것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옛 독재정권 잔당의 반격이라 볼 수도 있지만, 과거사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한 칠레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진영도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 지지율 12%의 집권 우파는 피노체트 집권 40년 기념식
지지율 44% 좌파연합은 피노체트 실각 25년 기념식


피노체트는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 당시 대통령이 군대에 포위된 채 대통령궁에서 목숨을 끊은 이후 17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독재정권은 반정부 성향의 지식인과 정치인, 예술가들을 탄압했다. 불법체포와 고문을 당한 이들만 3만명이 넘는다. 3197명이 목숨을 잃었고 1500명 이상이 아직도 실종 상태다. 

1989년 파트리시오 아일윈 대통령이 피노체트를 밀어낸 후 민주정권이 계속 들어섰지만 독재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사이 2006년 12월 피노체트는 91세로 생을 마감해 단죄를 하지도 못했다. 피노체트 쿠데타 40주년인 올해 들어 관련자 처벌과 책임 논쟁이 거세지자 전국판사협회가 “국가 폭력에서 인권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희생자들에게 사죄한다”고 했지만 당시 정권에 협력했던 반인도 범죄자 10명이 초호화 교도소에서 지내온 것이 알려져 공분을 샀다.

이미 사망한 피노체트는 다음달 대선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번 대선은 좌파연합 ‘누에바 마요리아(새로운 다수)’의 후보인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과 우파연합 ‘알리안사(동맹)’의 에벨린 마테이 후보 간 대결이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모두 공군 출신이지만 바첼레트가 피노체트에 맞선 장성의 딸인 반면, 마테이는 피노체트 측근의 딸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피노체트에 대한 뒤늦은 심판의 성격을 띠게 됐다.

양 진영은 각기 과거를 불러내는 방식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바첼레트는 지난 5일 피노체트를 몰아냈던 선거 25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반면, 집권 우파는 피노체트 집권 40주년 기념식에 신경을 썼다. 정치학자 마리아 페르난데스는 “피노체트 기념식은 사상 최저로 지지가 떨어진 현 우파 정권에 대한 반감을 없애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반독재 진영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바첼레트는 44%의 지지율로 마테이(12%)를 크게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