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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뉴스 깊이보기

[뉴스 깊이보기] 미국의 총기 문화와 우월주의

by bomida 2017. 10. 9.

5분간 58명이 목숨을 잃은 라스베이거스 총격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참사로 기록됐다. 그러나 총기사고 사망자 수만 놓고 보면 미국에선 그리 낯설지 않은 수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6일(현지시간) 비영리단체 ‘총기 폭력 아카이브’(Gun Violence Archive)의 자료를 바탕으로 라스베이거스 총격 때와 같은 수의 사망자가 나오는데 걸린 각 도시의 시간을 분석했다. 앞서 몇 달간의 총기 사망자를 합해야 지난 1일, 단 하루에 발생한 라스베이거스 참극의 희생자 수가 나오는지 계산한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총기 판매점에서 6일(현지시간) 남성이 반자동 소총 AR-15에 자동소총 기능을 가진 ‘범프 스톡’을 장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룻밤 58명 ‘학살’, 시카고에선 한 달간의 ‘일상’


시카고는 총에 맞아 6명 숨진 지난달 29일을 포함해 총 28일간의 사망자 수가 이미 58명에 달했다. 볼티모어(68일)와 세인트루이스(70일)도 석달이 걸리지 않았다. 필라델피아(105일), 캔자스시티(미주리주·117일), 휴스턴(118일), 디트로이트(121일), 인디애나폴리스(122일), 로스앤젤레스(125일), 뉴욕(130일), 멤피스(138일), 뉴올리언스(158일), 루이빌(켄터키주·177일), 콜럼버스(오하이오주·179일), 댈러스(180일) 역시 58명을 채우는데 몇달치 사망자면 충분했다.

 

이 때문에 총격에 숨진 이들의 규모보다 자동 소총으로 개조한 총으로 ‘대량 학살’을 범행했다는 잔인함이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04년 식당에서 무차별 총격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뒤 총기반대 운동가가 된 제니퍼 롱돈은 “매일이 총기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미국)는 ‘일상적인 총기 폭력’이라는 단어를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한다”고 캐나다 일간 토론토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라스베이거스 사고 이후 총기규제 촉구하는 목소리는 또 다시 높아지고 있지만 미국의 총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번 참극의 용의자 스티븐 패덕이 반자동 소총에 ‘범프 스톡’을 달아 대규모 살상이 가능한 자동 소총으로 바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장치를 판매금지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지만 총기 소지와 구입을 제한하는 법안이나 개정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뉴욕주립대 코틀랜드 캠퍼스의 정치학과 교수 로버트 스피처는 “공화당이 하원과 대통령(백악관)을 장악하고 있는 한 총기를 규제하는 핵심적인 법안은 통과될 수는 없다”며 “(공화당의) 답은 그저 ‘노(NO)’이다. 총기 권리로 뭉친 연합체를 방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3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이후 민주당을 중심으로 총기 구매자에 대한 사전 범죄경력 조회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추진됐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앞서 10년 전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 때도 대용량 탄창의 판매를 금지하려던 입법 움직임도 공화당의 벽에 막혀 좌절됐다. 지난해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 난사 때도 테러 관련 주의 인물에 대한 총기 판매 금지안이 발의됐지만 역시 공화당의 반대로 통과되지는 못했다.

이 같은 결정 뒤엔 전미총기협회(NRA)의 막대한 로비력이 있다는 시각이 많다. 5년 전 샌디훅 사건으로 민주당이 총기 규제 강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찬성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앞서 지난 4일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총기에 대한 추가 규제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지난 대선에서 3000만달러를 쓴 것으로 알려진 NRA는 공화당이 아직 대선 후보로서 트럼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먼저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트럼프는 역대 대선 후보 중 가장 ‘친(親) 총기’ 정책을 가지고 나온 후보로도 꼽힌다.

트럼프 당선 이후 공화당은 올해 미주리주에서 허가없이 무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법안을 개정했고, 조지아주에선 허가증를 가진 경우 캠퍼스 내 총기 소지를 허용했다. 오하이오주에선 아동이나 노령자,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데이케어(daycares) 인력들이 총기 휴대가 가능하도록 법안을 개정했다. 라스베이거스 총격전이 벌어지기 직전에도 공화당은 총기에 장착해 소리를 줄일 수 있게 하는 소음기 구입을 자유롭게 하는 법안을 추진해왔다.

'저격' 인원까지 계산…범행 동기는 미궁

이번 라스베이거스 참극에 대해 이슬람국가(IS)가 배후를 자처하기도 했으나 미국 수사 당국은 스티븐 패덕이 IS나 다른 테러조직과 연계됐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고 CNN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경찰은 패덕이 1982년부터 총기를 사들여 총 47정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범행 현장인 라스베이거스 호텔 방 안에서 23정이, 그가 소유한 주택들에서 나머지 24정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 중 33정이 지난해 10월부터 지난달까지 불과 1년 새 사들인 것으로 파악됐으며 호텔 방안에서 발견된 숫자가 콘서트 현장 등 저격 가능한 사람들을 계산한 흔적으로 알려지면서 사전에 치밀하게 범죄 계획을 세웠다는 정황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자신이 투숙한 만델레이 베이 호텔의 32층 방 창문에서 관중들이 모여있던 지상 공연장까지 거리와 모인 인파들을 바탕으로 이를 추산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일(현지시간) 최악의 총기 난사 사고로 58명이 숨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루트 91 하베스트 콘서트장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6일 희생자들의 사진과 꽃들이 놓여있다. UPI


그러나 패덕이 현장에서 자살한 데다 유서 등의 증거품도 남아있지 않아 범행의 동기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캘리포니아대 사회학과 교수인 트리스탄 브리지스와 타라 토버는 온라인 매체 쿼츠에 기고한 글에서 라스베이거스와 같은 미국의 대규모 총격이 “여전히 드물긴 하지만 다른 나라보단 훨씬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사회·심리학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미국 문화에 녹아있는 독특한 남성성과 폭력의 관계를 총격 사고와 연계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의 총기 수가 100명당 88정에 달해 스웨덴(31.6), 오스트리아(30.4), 캐나다(30.8), 프랑스(31.2), 독일(30.3), 아이슬란드(30.3), 노르웨이(31.3) 등보다 배 이상 많은만큼 총격 사건도 더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총기수와 대량 학살 수준의 총격의 상관관계를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두 교수가 제시한 단서는 ‘사회적 정체성의 위협’이다.

브리지스와 토버 교수는 미국에서 특히 남성들과 소년들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대규모 총격전을 벌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전통적인 ‘남성성’에 위협을 받으면 폭력, 남성 우위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성적인 강압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공화당 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이 선명해지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강해지며 국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전쟁을 지지하는 경향성이 뚜렷해졌다. 백인에 이성애자이며 장애가 없고, 교육받은 특권층에 속하는 미국 남성들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는 것이 두 교수의 설명이다. 사회학자 마이클 킴벨은 “이전 세대 남성에겐 당연했던 특권의 점진적 침식”이 남성성 위협으로 이어지며 이런 “미국의 독특한 감정이 남성들 사이에 ‘억울해할 자격’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교수는 “다른 사회에서도 남성성은 위협받고 있지만 미국의 문화에 이런 폭력을 지지하는 중요한 요인이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며 “총기의 규제와 함께 폭력·우월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지 않은 남성성을 갖기 위한 문화적 해결책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대규모 총기 공격 뒤엔 이런 문화적 요소와 정치가 얽혀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해결하기도 어렵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