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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검은 코끼리’의 동시다발 경고

by bomida 2017. 9. 7.

8월25일 허리케인 ‘하비’가 강타한 휴스턴 시내가 물에 잠겨 있다. 휴스턴 일대엔 닷새간 1300㎜가 넘는 폭우가 내려 3만2000명이 이재민이 됐고 30여명은 목숨을 잃었다. 휴스턴|AFP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동부에 위치한 소도시 시더 베이유에 닷새간 내린 폭우의 규모는 1318㎜. 휴스턴의 연평균 강수량(1270㎜)을 넘는 엄청난 빗줄기였다.


   허리케인 ‘하비(Harvey)’가 8월 25일 밤(현지시간) 텍사스 연안에 상륙하면서 휴스턴 일대에 미 역사상 가장 많은 비가 쏟아졌다. 주택 4만채가 침수되거나 파손됐고 3만20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30여명은 목숨을 잃었다. 12년 만에 가장 강력했던 허리케인의 파괴력을 두고 인간이 부른 기후변화가 ‘기름’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허리케인과 기후변화 사이의 인과관계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관성은 커졌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허리케인이 발생하는 횟수가 늘어나지는 않아도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그 위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바다의 온도가 높아지면 물이 가진 에너지도 그만큼 상승해 폭풍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대기 중에 습기가 많을수록 비의 양과 강도도 커진다.


   실제로 하비는 육지에 닿을 때까지 위력이 점점 커졌다. 앞서 미 국립 허리케인센터는 하비가 2005년 10월 허리케인 ‘윌마’ 이후 12년 만에 본토로 곧장 상륙하는 ‘카테고리 3등급’의 허리케인이라고 예보한 바 있다. 문제는 하비가 발생한 멕시코만의 올해 해수면 온도가 예년보다 0.5도 이상 높아졌다는 점이다. 바다표면이 0.5도 더워질 때마다 대기의 습기량은 3%가 증가한다. 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었던 하비는 텍사스 연안을 통과하며 48시간 만에 ‘카테고리 4등급’의 허리케인으로 변했다고 미 시사종합지 <애틀랜틱>이 보도했다. 지난 100년간 이미 해수면이 20㎝ 상승한 점도 허리케인이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미 국립 대기연구소의 케빈 트렌버스는 “이것이 바로 폭풍의 주연료”라며 “폭풍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만, 상승한 열에너지가 더 크고 강력하며, 더 오랫동안 (세력을) 지속하는 허리케인을 만든다. 또 더 많은 양의 폭우도 동반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허리케인이 보통 육지에 접근하면서 세력이 약화되는 것과 달리 하비는 상륙할 때까지 계속 세력이 커졌다. 텍사스 연안을 강타하기 몇 시간 전 4등급으로 격상됐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지난 30년간 육지 상륙 전 12시간 동안 세력이 강화된 허리케인은 없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하비가 고기압 전선 사이에 껴 정체됐던 점 역시 북극해 해빙이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주를 강타한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디킨슨의 라비타벨라 양로원 거실에 물이 차 노인들의 몸이 가슴팍까지 잠겨 있다. 양로원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공유한 사진을 딸 부부가 소셜미디어에 “응급구조가 필요하다”는 문구와 함께 올리면서 4500회 이상 리트윗되며 큰 화제가 됐다. 사진이 올라온 지 3시간 만에 이곳에 있던 노인 15명은 당국이 보낸 헬리콥터로 안전한 곳으로 구조됐다. 팀 매킨토시 트위터


   휴스턴 일간 <휴스턴크로니클> 편집장 버논 뢰브는 “휴스턴의 홍수가 기후변화와 맞서 싸우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는 내용의 기고를 <워싱턴포스트>에 실었다. 800년 만의 대홍수라는 이번 재해가 “온난화로 인한 극단적 기후현상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정치인들은 부인하지만 기온은 계속 오르고 빙하는 녹고 있다”며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들의 주장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스콘신대 매디슨캠퍼스의 우주과학공학연구소는 21세기 후반이면 허리케인 바람 세기의 증가 속도가 지금보다 10~20배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뢰브의 주장은 “기후변화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공화당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지난 6월 전 세계 국가들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약속한 파리 기후변화협정의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극단적 날씨로 인한 재앙은 이미 세계적 현상이다. 하비가 미국을 강타하던 시각 남아시아에선 지난 8월부터 시작된 몬순이 홍수를 부르면서 1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40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인도 서부 뭄바이에서는 8월 29일 하루에만 3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져 주택이 무너지고 도로가 침수돼 열차·항공 운항이 중단됐다고 현지 NDTV 등이 보도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물이 1.5m 높이까지 차올랐으며 학교는 물론 병원도 문을 닫았다. 네팔에서는 이번 폭우로 800만명 이상이 집을 잃었고, 방글라데시는 전체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특히 히말라야 산맥이 지나가는 이들 국가에선 산사태가 도로와 전기를 끊어 피해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적신월사연맹(IFRC)의 프랜시스 마커스 대변인은 “남아시아는 몇 년간 심각한 홍수를 겪고 있다”며 “미국의 상황 때문에 도움이 절실한 남아시아인들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루만에 300㎜가 넘는 폭우가 내린 인도 서부 뭄바이에서 지난달29일 시민들이 물이 찬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31일 5층짜리 주거 건물이 무너져 30명이 숨졌다.AFP연합뉴스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생트로페 해변의 휴양객들이 지난 7월 건너편 숲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전날 생트로페, 뤼베롱 등 남부의 지중해 연안 지방 곳곳에서 발생한 산불로 하루 동안 임야 1500만㎡가 소실됐다. AFP연합뉴스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의 말라붙은 분수. 교황청은 이탈리아 가뭄 위기에 연대하기 위해 지난 7월 시내 모든 분수를 가동 중단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바티칸|AP연합뉴스


   시에라리온 역시 예년에 비해 3배가 넘는 비가 내리면서 8월 13일 수도 프리타운 외곽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1000명 이상이 숨졌다. 이번 폭우도 사하라사막의 기온 상승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많다. 스위스 알프스 마을인 그라우뷘덴주 본다스카 계곡에서는 8월 23일 해발 3300m가 넘는 봉우리에서 400만 톤에 달하는 바위와 토사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 역시 온난화가 ‘원흉’으로 지목된다. 1864년 공식 관측이 시작된 이후 스위스의 기온은 평균 2도가량 상승했다. 온난화는 빙하와 동토층 해빙을 가속화시킨다. 스위스연방 산림눈경관연구소의 마르시아 필립스는 “동토층은 영하 1.5도 이하에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지만 이보다 높은 온도에 노출되면 암석과 얼음 사이의 결합에 문제가 생긴다”며 “이번처럼 대규모는 아니라도 앞으로 작은 규모의 산사태는 더 자주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올 여름에는 유독 궂은 날씨로 몸살을 겪는 도시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남쪽 니스 인근과 코르시카섬의 7월 낮 최고기온이 37~38도였고,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도 40도를 넘었다. 폭염에 시달린 유럽에선 포르투갈 레이히아주 등지에서 대규모 산불이 일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6월 강수량이 전년 대비 74% 줄어든 데 이어 7월에도 비가 예년보다 72%나 적게 내렸다. 기록적인 가뭄으로 교황은 바티칸의 분수 100개를 모두 잠그기도 했다. 일본과 중국도 6월부터 폭우에 시달린 가운데 지구 반대편 칠레는 눈폭탄이 내렸다. 수도 산티아고는 적설량이 40㎝에 육박해 46년 만에 최대 폭설을 기록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신간 <늦어서 고마워>를 통해 기후변화는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블랙 스완’(black swan)과 모두가 알고는 있으나 애써 무시하는 문제(elephant in the room)라는 의미의 ‘코끼리’를 합친 말이다. 트렌버스는 프리드먼의 말을 빌려 “(기후변화가 초래한) 허리케인 하비는 마주하길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아프라카와 중동, 남극과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검은 코끼리’가 있다”며 기후변화와 싸울 것을 촉구했다. 




미국 최대 화학공단, 허리케인 하비로 통제력 상실···‘시한폭탄’ 되나


 허리케인 하비가 휩쓸고 간 뒤 힘겨운 복구가 시작된 미국 텍사스주 남부에 또 다른 위험 적신호가 켜졌다. 넘쳐난 물이 수도와 전기를 끊고 이 지역에 들어선 미국 최대 석유화학공단 역시 통제력을 상실한 탓이다. 폭발 가능성이 큰 독성물질이 가득찬 공단은 ‘시한폭탄’이 됐다.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진 크로즈비의 아케마 화학공장에선 지난달 31일 오전 2시쯤(현지시간) 2차례 폭발이 일어나 높이가 9~12m에 이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프랑스 업체가 소유한 이 공장은 유기과산화물을 이용해 플라스틱과 건설자재 등을 생산하는 곳이다. 


 지난달 29일 하비가 몰고 온 폭풍과 홍수로 전기 시설과 보조 발전기까지 망가지면서 저온 유지를 위한 온도조절 장치도 작동을 멈췄다. 공장 측은 임시 방편으로 9개의 냉장 컨테이너에 화학물질을 옮겨 담았지만 1대가 고장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아케마의 임원인 리처드 레너드는 “화학물질이 든 컨테이너 9대 중 1대에 불이 붙었고, 나머지 8대도 폭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 공장은 빗물이 1.8m 높이까지 차올라 안전장치가 무력화되면서 폭발이 예고돼 왔다. 안전 당국은 반경 2.4㎞ 내 주민 5000여명과 공장 직원 60여명을 대피시켰다. 하지만 현장에 남아있던 안전요원 15명은 폭발 이후 연기를 들이마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텍사스A&M대 샘  화학공학 교수는 “아케마는 텍사스주에서 가장 위험성이 큰 공장”이라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방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공장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강화된 안전 규정을 가장 많이 위반한 화학업체 중 한 곳이라고 보도했다. 기업의 규정위반을 추적하는 업체인 바이올레이션 트래커(Violation Tracker)에 따르면 아케마 공장은 2010년 이후 직장 안전·건강·환경 등과 관련한 위반으로 120만 달러(13억원)의 벌금이 부과됐다. 


휴스턴 외곽에 있는 TPC의 석유화학 공장. 저 멀리 휴스턴 도심의 스카이 라인이 보인다. 텍사스만의 석유가 산업 기반인 휴스턴은 외곽에 이런 석유화학 공장이 400~500개가 밀집해 있다. 휴스턴|AP연합뉴스 


 텍사스주는 지난 2013년 비료공장 폭발로 15명이 사망한 뒤 규제 조항을 확대해왔다. 그러나 지난 6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규제 적용을 최소 오는 2019년 이후로 늦춰 시행하도록 연기했다. 비용 부담이 늘어난다는 화학업계의 로비 때문이다.

 미 환경보호청(EPA)은 현장을 항공 조사한 결과 이 공장에서 유독성 물질이 방출된 흔적은 없으며 텍사스 내 다른 화학 공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보고도 없다고 밝혔지만 우려는 커지고 있다.


 휴스턴 도심 외곽에는 미국의 최대 석유화학 공단이 자리잡고 있다. 사고 공장 인근 일대에 아케마와 같은 화학물질을 다루는 공장이 3곳이 더 있고 500개의 크고 작은 화학물 공장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물난리가 수습된 이후 폐쇄됐던 시설이 다시 가동되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물에 잠겼던 장비들의 안전 상태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엑손모빌과 셸 등 주요 정유사들의 석유 정제시설이 모여있는 걸프 연안에서도 약 900t규모의 화학물이 공기 중으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독가스뿐 아니라 홍수에 휩쓸린 독성 물질이 상수도를 오염시켜 수해를 더욱 악화시키는 2차 피해 위험성도 커진 상황이다. 미 연방항공청(FAA)은 화재 또는 폭발 우려에 이 지역의 항공기 운항을 일시 금지했다.


 다음주 멕시코만 서부에서 또 다른 열대성 폭풍이 형성될 수 있다는 징후도 있다. 아직 위력을 예측하기는 이르지만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이 지역에 비가 더 내리면 추가 범람의 위험성도 있다.


 텍사스주 보몬트 지역의 11만8000여명의 거주지엔 이날부터 식수 공급이 중단됐다. 이 지역 월마트는 매장 출입 인원을 1회에 20명씩, 물은 1인당 3명만 구매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병원도 폐쇄된 상태다. CNN은 “닷새 동안 폭풍을 겪은 후 물과 전기를 잃어버린 것은 (이번 사태의) ‘게임 체인저’”라며 “이는 누구에게든 재앙”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