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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아시아

오빠 따라 망명길···태국 최연소 첫 여성 총리 잉락, 국가 수배

by bomida 2017. 8. 27.

태국 일간 더네이션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잉락 친나왓 전 총리의 도피 소식을 전하며 ‘수배중’이라는 문구를 달았다. 더네이션 홈페이지


 오빠의 후광으로 권력을 잡았던 잉락 친나왓(50)이 결국 오빠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68)와 같은 운명이 됐다. 실형 선고가 예상된 재판이 열리기 직전, 망명길에 오르면서다. 태국의 최연소, 첫 여성 총리였던 그는 군부와 왕당파의 ‘탁신파 몰아내기’로 국가 수배를 받는 총리가 됐다.


 방콕포스트 등은 지난 25일 대법원의 형사소송 판결을 앞두고 종적을 감췄던 잉락이 현재 오빠인 탁신과 함께 두바이에 있으며. 영국행을 준비 중이라고 27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잉락은 오빠의 ‘도피처’에서 합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잉락은 2011~2014년 농가 소득보전을 위해 쌀을 시장가보다 50%가량 높은 값에 수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부패를 묵인한 혐의(직무유기)를 받아왔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고 10년형이다. 하지만 그가 도피하면서 선고공판은 다음달 27일로 미뤄졌다. 대법원은 예정된 공판에 잉락이 출석하지 않더라도 궐석재판 형태로 판결문을 낭독할 예정이다.


 잉락이 육로로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넘어가 싱가포르를 거친 뒤 두바이에 도착해 탁신을 만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도피 과정을 현 군부 정권이 도와줬거나 묵인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쁘라윗 왕수완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과 동부 캄보디아 국경 수비를 맡은 군부 측은 이를 부인했지만 태국 반정부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잉락의 탈출 경로를 수사해 관련자들을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 2월 쁘라윗 부총리가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져 보호가 필요하다”며 군부가 잉락을 수개월간 미행했던 점을 들어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연루됐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그의 도피가 군부와 잉락, 모두에게 윈윈이라는 시각도 있다. 쭐라롱껀대 푸엉통 파왁빤 정치학 교수는 “잉락이 실형을 선고받아 정치적으로 ‘순교’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군부도 (도피를) 반길 것”이라고 더네이션에 말했다.


 여기엔 탁신에 이어 잉락도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2000년대 이후 탁신파와 군부가 맞섰던 태국의 정치가 맞물려 있다.


잉락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지지자들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대법원 앞에서 잉락과 그의 오빠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사진을 들고 서 있다. AP연합뉴스


 2009년 11월 친탁신계 푸어타이당의 대표로 정치에 첫 발을 들인 잉락은 태국 최대 통신업체 AIS의 최고경영자였다. 오빠가 만든 회사를 이어받아 경영했듯, 정치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탁신의 막내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농민·도시노동자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던 탁신계 정당은 2000년 이후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두 번이나 집권당을 해산하면서 타이락타이당(2001·2005년), 피플파워당(2007년), 푸어타이당(2011년)으로 이름은 바꿔었지만 언제나 승리는 탁신이었다. 잉락 역시 탁신이 망명을 떠나 태국에 없었지만 2011년 선거에 압승, 정치 입문 6주만에 첫 여성 태국 총리가 됐다.


 되풀이 된 선거 결과에 언제나 반기를 든 것은 군부·왕당파였다.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과 국왕에 충성하는 군부, 왕당파 정치인 등을 주축으로 반(反)탁신세력은 ‘옐로셔츠’를 입고 반정부 시위를 통해 집권당 해산이나 쿠데타를 불렀다. 특히 지난해 타계한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은 2006년 탁신을 몰아낸 쿠데타를 승인한데 이어 2014년 5월에도 잉락 정부를 뒤엎은 군부 쿠데타를 닷새 만에 승인했다. 이에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탁신을 몰아낸 배후에 국왕이 있다는 분석도 많다.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서 친탁신 진영은 “선거로 선출된 정부를 야권, 사법부가 무력화시켰다”며 반발했고 “지지층 수가 적은 야권들이 국민의 선택을 뒤엎는다”고 비판했다. 2011년 잉락을 총리로 만든 총선 직후에도 태국 군부가 탁신과 잉락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온 바 있다. 실제로 2014년 잉락을 취임 2년9개월 만에 몰아냈던 쿠데타 이후 현 군부 정권은 지난해 개헌에도 성공했지만 과도 정부를 이끄는 쁘라윳 찬오차총리는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 일정을 아직도 결정하지 않고 있다.




 잉락은 2014년 5월 권력남용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헌재의 탄핵이 결정 된 뒤, 쌀 수매와 관련한 민사소송으로 350억 바트(1조1700억원)의 벌금형을 받고 재산도 몰수당했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탁신 지지의 기반인 북동부 농촌을 겨냥한 포퓰리즘 성격의 정책이기는 하지만 인도와 베트남에서 쌀 생산을 늘려 쌀값이 떨어졌던 상황에서 정부가 농가의 소득보전 차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AFP는 “남매가 태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면서 (탁신가의) 정치적인 생명은 끝났다”고 보도했고, 푸엉통 파왁빤 교수는 “친나왓 가문과 푸어탕이당이 정치적 정통성을 잃었다”고 평가했지만 지난 2년간 한번도 태국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법적 대응에 맞서온 잉락이 별안간 공판 며칠 전 외국으로 떠난 것은 석연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옐로셔츠에 맞서 ‘레드셔츠’를 입고 친탁신 진영 집회를 주도해 온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 측은 싱가포르 일간 스트레이츠타임스에 “(두 남매가) 외국으로 나가 법적싸움은 길어질 것이지만 그것이 잉락에게 유리하다면 우리는 이해한다”며 “그의 모든 일생을 (민주주의를 위한)싸움에 헌신해 달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단 잉락에 대한 판결이 미뤄지면서 2014년 쌀 수매 정책 찬반으로 촉발된 친탁신·반탁신 세력간 유혈 시위와 같은 대혼란은 막게 됐다. 태국상공회의소 칼린 사라신 회장은 현지 일간 더내이션에 잉락의 도피 소식에 “정치적 대립이 줄어 정치환경이 나아질 것”이라며 안도감을 나타냈다. 그는 “민간에선 정치적 안정을 원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잉락의 혐의에 대한)판결이 아니라 태국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지, 수익을 낼 수 있는지가 더 관건”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