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10) ‘서울의 도시철학’을 묻는다
▲ 판자촌 밀어낸 산업화 상징
첫 정비방안 나온 지 36년, 사업 미궁에… 사실상 방치
‘용도폐기·복원’ 해법 주목
인구 1038만명. 1인당 소득 2만8739달러. 도시 지속가능성 세계 7위.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서울이 60여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일제로부터 독립해 잃어버렸던 이름, 한성이 아닌 서울을 되찾은 지 70년. 1964년 342만명이던 인구는 3배가 됐고 국민 5명 중 1명이 서울에 터를 잡았다. 1961년 100달러에도 못 미쳤던 개인소득은 300배로 늘었다.
세계에서 9번째로 비싼 물가, 청년실업률이 10%를 넘고 혼자 사는 청년의 36%가 주거빈곤층인 곳. 무질서한 도로와 옛 소련식 콘크리트 아파트, ‘영혼없는 단조로움’(론리플래닛 서울판)이 가득한 세계 최악의 도시 3위. 성장과 효율성을 내걸고 달려온 서울의 또 다른 성적표다. 격변의 한국, 그 수도 서울은 어떤 도시철학을 담고 있을까.
서울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잇는 세운상가의 지난해 7월 모습이다. 세운상가는 한국의 첫 주상복합건물이며, 서울의 도시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곳이다. 전후 도심재개발의 일환으로 지어진 이 상가는 한때 전자·전기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쇠락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다시 살릴 방법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 서울시 제공
■ ‘서울 철학’과 세운상가
해방 후 냉전의 중심에 섰던 한국의 운명은 서울 곳곳에도 흔적을 남겼다. 일제는 1930년대 말 태평양전쟁을 시작했고 한성 역시 공습 대비에 들어갔다. 4대문 안을 가르는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곧게 뻗은 길. 폭격을 받아 불길이 이 도로를 타고 도심 전체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일제는 남북으로 소개 도로를 냈다. 왕실 사당인 종묘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로 한복판에 폭 50m, 길이 1㎞를 치워 소개 도로를 완성했으나 일제는 이 커다란 빈터를 만들고 두 달 뒤 패망했다.
광복의 기쁨이 찾아왔지만 서울은 곧 한국전쟁으로 쑥대밭이 됐다. 피란길에 오른 이들이 종로 가운데의 텅 빈 옛 소개도로에 판잣집을 지었다. 전후 이곳은 빈민촌과 사창가가 됐다. 1960년대 도심재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했던 군사정권에는 이 슬럼가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판자촌을 밀어내 서울의 랜드마크를 짓기로 한다. 건축가 김수근은 이 소개도로를 따라 한국의 첫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를 제안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2차 세계대전 후 복구 과정에서 전 세계는 옛 도시를 복원할지, 새 정체성을 만들지 고민했다”며 한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수근식 모더니즘의 결합이 세운상가로 구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성장의 열망이 세워올린 세운상가는 전자·전기·기계산업의 중심지가 됐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TV와 컴퓨터 수요가 늘던 시기에 이 상가는 강북의 거대 산업생태계를 이끌었다. 구하지 못할 부품이 없었고, 조립하지 못하는 게 없었다. ‘세운상가에선 미사일도 만든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위쪽 아파트 건물에는 슈퍼마켓, 실내골프장, 피트니스센터도 있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이곳 주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1990년대에 누릴 삶을 살고 있었다.
이름처럼 ‘세상의 기운을 모은’ 상가를 흔든 것은 1968년 1·21사태다. 무장공비가 들어와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다. 안보 불안심리가 확산되면서 ‘강북 대신 강남’이 대세가 됐다. 강남 개발의 시동이 걸렸고 1979년 세운상가는 정비에 들어갔다. 용산전자상가가 급부상한 1990년대 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줄자 더 이상 서울의 현대화에 쓸모가 없어진 세운상가는 ‘빽판’ ‘빨간테이프’ ‘야한 잡지’의 기억조차 덮어야 했다. 2007년 마침내 전면 철거 계획이 확정됐다.
하지만 주민을 배제한 도시계획은 갈등을 낳았다. 700%가 넘는 용적률, 재개발 기대심리로 치솟은 땅값. 주민들의 개발 부담은 커졌고 상가 안팎에선 불협화음이 나왔다. 세계 경제위기로 부동산 경기마저 침체되자 사업성은 미궁에 빠졌다. 첫 정비안이 나온 지 30년이 지나도록 세운상가는 방치됐다.
■ 무질서의 역사… 서울식 해법
서울은 유럽·미주 도시와 100년 넘게 벌어져 있던 산업화 속도를 따라잡아 기술발전과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덕분에 도시에는 무질서한 공간이 산재해 있고, 시민들의 삶속엔 불평등이 스며 있다. 서울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한 네덜란드 건축가 바트 레우세르는 질서 없는 서울의 도심 경관을 ‘생존을 위한 흔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가 쓴 책 <서울해결법(Seoulutions)>은 해방 후 반세기 넘게 굴곡진 삶을 견뎌온 ‘서울(Seoul)의 해법(Solution)’을 이야기한다.
수평·수직으로 덧대고 덧붙여 면적을 늘리고 층마다 출입문을 단 뒤 외부계단으로 연결한 주택들은 도시 구조물이 살아 숨쉬는 존재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택가와 상업지가 얽혀 있는 홍대에 주목했다. 1층을 개조해 사무실로 만든 주택, 에술가들의 작업실이 들어 있는 시장. 예상치 못했던 변화를 받아들이며 사회·경제적 요구를 그때그때 담아온 홍대의 끊임 없는 변화는 서울의 역동성을 대표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 건축행위가 사회에 흡수돼 합법화되는 유연성을 한국의 독특한 도시변형 요소로 봤다. 용적률과 고도제한 같은 법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경제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조금씩 편법을 오가는 건축물들은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서울은 최근 성장의 대안이 될 철학을 찾고 있다. 낡은 것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고쳐쓸 수도 있다, 두서없이 쌓인 기억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쪽으로 발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도시를 ‘재개발’하지 않아도 ‘재생’시킬 수 있다. 세운상가도 이 방향에 맞춰 철거하는 대신 축적된 기술을 이용해 강북의 산업과 연계할 수 있는 방식을 논의하고 있다. 2006년 되살아난 청계천과 다시 한번 만나게끔 보행 환경을 개선하기로 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는 “생태적 재생뿐 아니라 건물 자체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소비하는 문화적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며 “세운상가의 기억과 역사를 복원하는 것도 도시의 자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0일 서울시립대에서 지리정보시스템(GIS) 전문가 나탈리 두알때 밸무드스를 만났다. 콜롬비아 보고타시 지구계획사무국에 일하는 공무원이다. 도시계획을 배우기 위해 1년 전 한국에 왔단다. “서울에서는 무엇인가 ‘바꾸자’ 하면 바로 실행되더라고요. 위례신도시는 7년이 걸렸다는데, 보고타는 계획을 확정하는 데에만 5년이 걸려요.” 같이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쿨락 안톤은 동유럽 벨라루스 페르보마이스키의 지방공무원으로 도시계획·건설책임자다. 그래서 뉴타운 정책에 관심이 많다. 그는 “재개발을 하거나 지하철 공사를 할 때 공공기관이 정책을 세우고 민간이 건설을 맡는 구조는 흥미롭다. 효율적인 재개발 방식으로 벨라루스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서울의 속도다. “서울의 인구밀도와 성장속도는 압축성장 모델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적절한 방법이었음을 보여준다. 보고타는 도심 공간이 부족하다. 서울의 재개발 과정에서 건물을 복합용도로 사용해 생산성을 높였던 정책을 들여다보고 있다.”(나탈리) “서울은 유럽이나 미국의 도시들과 다른 계획성장을 택했다. 성장속도가 빨랐던 것은 이 방식이 효율적이었다는 얘기다. 서울은 목표를 이뤄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도시개발의 성과가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공한 경험은 무엇이든 도움이 된다.”(쿨락)
압축성장이 필요한 곳에 서울의 경험은 유용한 팁이라고 했다. 보고타에서 온 도시계획가 카르바잘 핀토 바바라는 “서울은 신도시 건설 등의 큰 프로젝트뿐 아니라 여성용 원룸 짓기 같은 작은 프로젝트도 동시에 진행하는 식으로 다양한 도시계획을 실현하고 있다”고 했다.
“9개 지하철 노선을 비롯한 대중교통과 도로·주택·공원 같은 공공공간, 무역·상업단지까지 짧은 시간 내에 완성했잖아요. 법 규정도 견인차 역할을 한 것 같더군요. 토지보상제가 인상적이었는데, 우리도 비슷한 법이 있지만 속도를 내지 못해요.”
서울은 살기 좋은 도시라고도 했다. “급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도시 기반시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한 방법이 궁금한 거예요. 수돗물도 그렇고, 어디서든 10~15분 내 탈 수 있는 대중교통도 그렇죠. 주거지 바로 옆에 상업지가 있어 편리한 점도 있고요. 마곡단지는 정보기술(IT) 산업단지인데 주거도 가능하잖아요. 아마 서울은 사람들이 갑자기 불어나면서 빠르게 발전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을 거예요. 가난하고, 집이 없는 사람도 모였죠. 답은 ‘콤팩트시티’(Compact city)인 것 같습니다. 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아이를 키우고 여가를 보내는 것이 작은 생활반경 안에서 해결되도록 한 것이죠.”(나탈리)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경쟁력도 들려줬다.
카르바잘은 한마디로 “지루하지 않은 도시”라고 했다. “갤러리와 도서관, 공원 등 문화공간이 많아요. 가장 좋은 것은 산이에요. 북한산을 자주 가는데, 시민들이 언제든 오를 산이 도심 복판에 있다는 것은 서울의 큰 자산이죠.” 나탈리는 ‘사람’이 서울의 강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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