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시&이슈/서울이야기

“장애 아들 자립 위해 ‘성미산’으로 이주… 유토피아가 아니라 스스로 돕는 마을이죠”

by bomida 2014. 9. 5.


“성미산이 있는 서울시 마포구에, 성인 자폐 장애인이 몇 명이나 살고 있을까요?”


인터뷰가 끝나갈 때 쯤, 정찬이 어머님이 물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다 "한 백명 정도 되나요?" 라고 답했죠. 하지만 땡! 정답은


“열 명이 채 안돼요. 생각해보면 길을 걷다가, 아니면 가게에서 자폐증세가 있는 어른들을 본 적이 없을 거에요. 아이들은 가끔 있지만요. 자폐증을 가진 아이가 성인이 되면 도시에서 살기가 힘들거든요. 성인 자폐장애인을 받아주는 복지관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부모들은 연고도 없지만 시설이 있는 지방으로 가게 되죠.” 


헐.. 잠시 멘붕이... 정말 그런 것 같았거든요. 초등학교(저는 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만;) 때는 분명히 몇몇 반에서는 같이 공부하기도 했었는데, 성인이 된 지금은 동네에서 거의 보지 못한것 같네요. 생각해보니 취재를 나가서야 이 친구들을 접하게 되는게 사실입니다.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또 이제 너무 성숙단계에 접어든 성미산이 마을 만들기가 붐을 이루고 있는 최근의 도심 정책에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안고 시작한 취재에서 힌트를 얻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도시에 무슨 마을이 필요해? 어차피 내집도 아니고 2년 후면 다른 동네로 이사가게 될지도 모르는 걸?


저도 비슷한 심정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살고 있죠.. 하지만 정찬이를 자라온 동네에서 끝까지 살게 하고 싶은 어머님의 절박한 마음은 왜 도시에도 마을이, 공동체가 필요한지 제가 답을 주었습니다.


지면기사에 담지 못한 내용까지 담은 인터뷰 전문입니다.



ㆍ서울 ‘성미산마을’ 20년… 주민 최경화씨 인터뷰

서울 마포구 성산1동 성미산마을에서 더치커피(찬물로 우려낸 커피)를 생산하는 마을기업 ‘좋은날’의 운영이사 최경화씨(51·사진)가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9년 전, 아들 이정찬씨(22)가 중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집에서 직접 가르칠지, 특수학교에 보낼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던 때였다.

자폐장애 1급인 정찬이는 일반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처음에 아이를 맡을 인력이 없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지만, 그가 아들의 보조인을 맡겠다고 사정해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다른 아이와 수업 이해 수준이나 수업 시간을 참아낼 인내심도 다른 정찬이의 시간표는 엄마가 직접 짰다. 6년간 매일 같이 등교해 아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키우려고 애를 썼다. 

“나도 교사였기 때문에 매일 같이 학부모가 학교로 찾아오는 것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워할지 알아요. 하지만 어릴 때만큼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자랐으면 했어요. 그렇다고 예민한 자폐아에게 똑같이 수업을 듣게 할 수도 없어 대학생처럼 골라서 수업을 들은 거죠.(웃음)”

그는 쉽지 않은 6년을 “투쟁적인 시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노력도 한계가 왔다. 중학교 수업은 아들이 감당하기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대안학교를 찾다 성미산 학교 이야기를 들었다. 학무모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학교가 문을 연지 3년째 접어들면서 여론의 관심이 급증했던 무렵이다. 거액의 출자금과 일반 학교보다 비싼 학비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찬이가 태어난 후 최씨가 교사직을 그만둬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부부는 결정을 내렸고, 그간 살던 쌍문동을 떠나 성산동으로 이사를 왔다.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비장애아들과 통합교육을 하고, 부모와 교사가 같이 학교를 만들어 간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동안 생각해왔던 그런 학교라고 생각을 했죠.”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대안학교는 이제 막 실험을 시작했고, 특수아동을 맡아 교육한 경험도 없었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낸 학교지만 실망도 컸다. “통합교사(특수교사)에게 찾아가 일반학교처럼 프로그램식 교육을 하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따지기도 했어요. 성미산마을은 모든 것이 내 뜻과 같은 유토피아는 아니에요. 장애에 대해 다른 곳보다 열려있긴 하죠. 하지만 그 이상을 마을에서 만드는 것은 제몫이었어요.”

그때부터 최씨는 정찬이와 성미산에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과자를 굽는 것을 좋아하는 정찬이는 고등학생이 된 후엔 직접 만든 과자를 학교에서 팔았다. 처음에는 엄마와 만든 리어카를 가져다 놓고 팔았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교 동생부터 선생님들까지 정찬이의 과자를 사 먹었다. 그러자 학교는 빈 공간에 작은 카페를 만들어 정찬이게 내줬다. 사회적 기업에도 등록하면서 인건비 지원을 받았고, 정찬이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정찬이와 같은 장애를 가진 학교 누나는 과자 대신 밀랍초를 만들어 카페 한 켠에서 팔았다. 학교와 마을이 아이들의 사회 첫 발을 만들어 준 셈이다.


“그래도 이곳에 온 이유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아이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마을 주민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던 거죠.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만들려고 노력하면 서로 돕는 곳이 성미산이거든요. 비빌 언덕이 있으니 이런 시도도 해봤던 거죠.”

정찬이는 성미산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1년 넘게 카페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학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더 성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엄마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주민들과 모여 길을 터보기로 했다. 아이들을 가르쳤던 통합교사도 뜻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열 가구가 1년간 공부를 했다. 강사를 불러 의견을 듣고 일본 마을의 작업 공동체를 연구한 끝에 8~10시간씩 천천히 우려내는 더치커피가 아이들의 마을살이 일자리로 적합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2010년 늦가을 논의가 시작돼 겨울에 협동조합 준비를 마쳤다. 2012년 겨울, 7가구가 300만원씩 출자해 조합을 꾸렸다. 마을 주민들 중에도 사비를 털어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생겼다. 마을 은행인 성미산 금고에서도 투자해줬다.

“우리 식구는 성미산에 온지 6~7년밖에 안됐지만 대부분 공동육아부터 시작해서 10년 이상 봐온 사람들이잖아요. 좋은 일만 있었겠어요? 모든 것을 다 겪어온 사람들이죠. 그래서 뜻이 맞고 일을 해보자고 결심이 되면 빠르게 진행돼요.”




그렇게 해서 최씨는 주민 21명이 조합원인 마을기업 ‘좋은날’의 운영이사가 됐다. 정찬이를 포함해 성미산학교를 졸업한 발달장애인 4명이 일한다. 모두 주급 4만원씩 받고 제 몫을 한다. 
“임금과 가게 월세를 내다보면 아직은 적자지만, 한 명씩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수익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데, 받고 돈을 소비하는게 아이들의 일과가 되면서 마을에서 그 돈을 쓰는 거에요. 소비는 마을의 일원이 되는 핵심이기도 해요. 편의점에서 미용실까지 생활 반경도 넓어졌어요.”

이곳에서 만들어진 커피는 또 다른 마을기업인 두레생협에 납품한다. 생협 점포 100곳 중 마을 안에 있는 성산점 매출이 단연 높다. 생협 점포 100곳 중 15개점에서 판매하는데 같은 마을 안에 있는 성산점 매출이 단연 높다. “사실, 당연한거에요. 성산점 조합원들은 우리 이야기를 알잖아요. 공동육아로 자란 아이들이 커서 만든 제품이 진열대에 있으니 팔아주는 것이죠. 그게 마을의 힘이에요. 다른 곳에서 시작했으면 판로 개척은 생각도 못했을지도 몰라요. 제품의 이야기를 알고 소비하는 게 성미산의 경제에요. 마을 두레생협에서 식재료를 사고, 비누두레에 가서 비누를 사는 이유죠.”

성찬이와 함께 학교 카페에서 초를 만들던 누나도 마을 기업인 ‘밀랍초 공방’에서 일하고 있다. 최경화씨는 청년이 된 아이들과 성미산 학교를 다니고 있는 어린 장애아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한 달에 한번 같이 소풍을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간다. 장애를 가진 이들이 마을에 자리잡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부대끼며 살아왔으니까 계속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마음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부모들이 지금부터 노력하는 것이죠.” 

부모들의 바람은 똑같다. 언젠가 혼자 남게 될 아이들이 시설 대신 성미산마을에 남아 일하고 소비하며 다른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다.

“장애아를 키우면서 성인 이후를 고민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에요. 우리 아이가 잘 살려면 건강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생태가 파괴되면 안된다는 식으로 다 연결돼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서 이해를 받으려면 그 사회의 인권 감수성도 높아야 하잖아요. 우리 아이가 잘되려면 옆에 아이도 잘 되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성이 없는 사회에 이 아이만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 성미산마을
1994년 뜻있는 부모들이 공동육아를 위해 어린이집을 열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성미산마을이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성미산마을은 대안학교와 마을기업으로 확장해가며 ‘도시 속 마을’의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뉴타운’ 광풍이 잦아들고 각 자치단체들이 도시재생 차원에서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붐이 일면서 성미산은 또 한번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