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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넋 잃은 필리핀’ 2신]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 폭격 맞은 듯이 ‘폭삭’… 식량 동나 “교도소 폭동 직전”

by bomida 2013. 11. 12.

ㆍ한국 외교부 직원·의료진 등 미 군용기 타고 타클로반 도착

ㆍ야간 통금… 1~2주면 면역 한계 ‘전염병 공포’

모든 건물은 부서지고, 모든 전선은 끊기고, 전신주와 나무는 전부 뽑혔다. 온전한 유리창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흘째가 되자 시신은 길거리에서 치워졌지만 소와 개, 고양이 같은 동물들의 사체는 길 위에 방치돼 있다. 악취가 진동해 코를 막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다. 슈퍼태풍 하이옌에 초토화된 필리핀 중부 레이테섬 타클로반의 첫인상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타클로반으로 향하는 길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레이테섬과 이웃한 세부의 공항은 12일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필리핀항공 세부-타클로반 노선이 다시 열렸다는 소식에 다들 표를 구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치 표가 모두 동나 대부분은 발길을 돌렸다.

‘죽음의 도시’로 변한 필리핀 타클로반에서 탈출하기 위해 12일 공항에서 기약없이 수송기 탑승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남성의 어깨 위에 어린 딸이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다. | AP


한국 정부는 연락이 닿지 않는 타클로반 교민 10명의 안전을 확인하고 구조활동을 하기 위해 미군에 수송기 협조를 요청했다. 미 대사관이 군용기를 한국 측에 제공하면서 겨우 길이 뚫렸다. 기자는 전날 급파된 외교부 신속대응팀, 박용증 필리핀 영사 등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타클로반으로 향했다. 국립의료원에서 파견된 의사 1명과 119 구급대 2명,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대원 6명이 현지 구호활동을 위한 선발대로 함께 탑승했다.

오후 3시쯤 도착한 타클로반 공항은 아수라장이었다. 이 공항의 정식 이름은 다니엘 로무알데스 국내선 공항이다. 레이테섬 출신인 유력정치인 로무알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무알데스는 옛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의 사촌이기도 했다. 타클로반은 ‘마르코스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르코스의 옛집도 이곳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군 기지에서 출발해 지난해 114만명의 탑승객이 거쳐간 공항의 2층 건물은 타클로반의 자랑거리의 하나였지만 이번 태풍으로 폭격을 맞은 듯 부서져 있었다. 마닐라로 나가는 비행편을 겨우 잡은 이들이 소낙비 속에 줄지어 서 있다. 공항 여기저기 간이천막을 친 임시진료소가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여성들과 임신부들이 천막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무장 경찰들은 공항 안팎을 오가는 인파를 통제했다. 한 소녀가 경찰에게 “엄마를 찾아야 한다”며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5분여 실랑이 끝에 소녀는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철창 밖에서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행기가 들어오는지 보고 있었다. 외지에 있는 친척들이 먹을거리라도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공항에서 만난 메이 후아니데는 마닐라에서 의료물자를 싣고 들어오는 의료팀 비행기에 간신히 자리를 얻어 들어왔다. 후아니데는 “친척들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마시고 먹을 게 전혀 없다더라”며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보안요원들 도움 없이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했다.

미군과 필리핀군 수송기들이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지만 이렇게 섬 밖으로 ‘탈출’하는 사람은 하루 몇백명 수준이다. 공항에서 만난 교민 신태호씨는 아이 셋을 마닐라 친지에게 보내려 하고 있었다. 신씨는 “태풍이 온 뒤 집에 있는 것들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지금까지 구호물자 등 지원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신씨의 집은 콘크리트 주택이었는데도 크게 부서졌다고 했다. 타클로반은 해수면과 거의 맞먹는 저지대다. 지난 8일 아침 태풍과 함께 쓰나미처럼 물이 들어오면서 도시를 휩쓸었다. 공항 주변 산호세에서만 1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씨는 11일부터 간간이 이어지기 시작한 통신 신호를 잡아 페이스북으로 지인들에게 살아 있음을 알렸다.

산호세에서 타클로반 시가지를 지나 교외의 카트발로반으로 향했다. 도로 가운데로 차가 지나다니고는 있지만 뒤집힌 차와 쓰레기들이 산더미같이 뒤엉켜 있었다. 집을 떠나지 않은 여성들은 빗물로 빨래를 하고 있었지만 수건 등으로 코를 막고 있다. 짐을 지고 공항 쪽으로 걸어가는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차가 있어도 기름을 구하지 못하면 걷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뚫린 도로들도 공항으로 향하는 차와 오토바이, 사람들이 뒤엉켜 오도가도 못하는 곳이 많았다. 

타클로반이 있는 레이테섬과 북쪽의 사마르섬을 잇는 2.2㎞의 산후아니코 대교는 다행히 이번 태풍에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폭풍우가 몰고온 잔해들로 가득찼다. 사마르섬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에 필리핀 정부는 군을 동원해 다리 위를 치우고 구호차량을 들여보내려 애쓰고 있다.

타클로반 탈출 행렬 슈퍼태풍 하이옌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12일 타클로반 공항에서 미군 C-130 수송기를 타기 위해 몰려들자 군인들이 통제하고 있다. 생존자 수천명이 수송기를 타기 위해 타클로반 공항을 찾았지만 이날 수백명만 타클로반을 빠져나갔다. | AP


타클로반은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말부터 4개월간 필리핀의 임시수도이기도 했다. 주민 22만명 중에는 스페인계 혼혈(메스티소)과 중국계가 많다. 빈곤율(9%)은 필리핀에서 가장 낮고, 경제적으로 이 나라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던 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태풍 하이옌으로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갔다.

마닐라불레틴 등 현지 언론들은 타클로반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약탈을 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혼란을 틈타 무너진 가게들에 남아 있던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같은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적십자위원회 구호물품도 강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약탈을 막기 위해 군인들이 타클로반 시내 곳곳에 검문소를 세우고 검문을 하고 있다. 필리핀 DZMM 라디오는 막스 로사스 내무차관이 “장갑차량들을 타클로반 주변에 배치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기 소유가 자유로운 필리핀에서는 언제든 인명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태풍 이전에도 한국 교민들에게 그리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버리고 간 아이들, 이른바 ‘코피노(한국계 필리핀인)’ 문제 등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탓도 있다. 세부 등지에서는 올 들어 계속 교민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필리핀 정부는 군과 경찰을 배치한 데 이어 이날 오후 6시 이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집을 잃은 사람들이 밤중에 어디에서 어떻게 묵을지는 대책이 없는 듯했다. 유엔이 타클로반 공항과 시청에 본부를 차리고 구호단체 활동을 총괄하고 있고, 한국의 코이카도 곧 합류할 예정이다. 하지만 구호단체들은 자연재해에 이은 ‘인도적 대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었다.

무너진 터전… 정처 잃은 사람들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폐허가 된 필리핀 타클라반 도심에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뒤엉켜 있는 가운데 12일 주민들과 차량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 김보미 기자


간호사인 히에라 글링고(27)는 적십자위원회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 원래는 지난달 지진이 일어난 보홀에 파견될 예정이었는데, 하이옌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타클로반으로 오게 됐다. 그의 임무는 생사불명의 가족을 찾는 이들을 돕는 것이다. 글링고는 “가족을 찾아달라는 신고가 이미 적십자에만 2만건 넘게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해 문의해온 친지들에게 알려주고, 다친 이들은 레이테섬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지만 “도와줄 사람을 발견해도 어떻게 데리고 나갈지가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글링고는 1~2주만 지나면 타클로반이 ‘면역의 한계’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쉴 곳도 먹을 것도 부족한 이들에게 전염병이라는 또 다른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얘기다. 아이들은 물이 보이면 마시기 위해 컵을 가지고 다니지만 깨끗한 물인지는 알 수 없다. 타클로반 교도소에 먹을 것이 떨어져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방송에는 교도소 지붕 위에서 “가족의 생사라도 알게 해달라”고 외치는 수감자의 얘기가 보도됐다.

필리핀 당국은 이번 태풍으로 12일 현재까지 숨진 것으로 확인된 인원이 1774명이라고 발표했다. 유엔은 태풍 피해를 입은 사람이 1100만명에 이를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