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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주

‘빅브러더’ 미국, 실리콘 밸리와 100여년간 은밀한 ‘정보 공조’

by bomida 2013. 7. 19.

ㆍ밸리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긴밀한 협조
ㆍ유럽 국가들, ‘프리즘’ 정체 드러난 후 ‘전문 스파이 기술’ 위협 받을 위기감에 강도 높은 반발

세계 국가들이 사이버 안보를 두고 각을 세우고, 정보 당국은 새로운 감시 기술을 타국보다 먼저 확보하려고 경쟁을 벌인다. 막지 않으면 뚫리는 싸움이다. 정보력이 국력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기술 협력사 직원이던 에드워드 스노든(30)의 폭로로 드러난 국가안보국의 개인정보 수집 프로그램 ‘프리즘’은 정부의 감시에 대한 공분을 일으켰지만 정보 당국은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해명했다.

스노든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 페이스북 등 많은 기술기업들이 이 작업에 연루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첨단기술의 중심지 실리콘 밸리 업체들은 이번 사건과 거리를 두며 사실을 부인한다. 그렇지만 실리콘 밸리의 역사를 보면 이들의 공조 혐의는 짙다. 기술 산업과 정부의 스파이 요원간 긴밀한 협조가 시작된 것은 밸리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미국 기술·정보기업의 산실인 실리콘 밸리가 형성될 당시 창업한 무선기업 ‘페더럴 텔레그래프’ 최고 경영진이 캘리포니아 팰러 앨토의 본사에서 1917년쯤 찍은 사진. | 히스토리새너제이 홈페이지


■ 원조격 기업들, 연방정부와 방위 계약으로 급성장

실리콘 밸리의 원조격 기업들은 연방정부와 맺은 방위 계약으로 경영의 신성장 동력을 찾았다.

‘페더럴텔레그래프’는 1909년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지역에 설립된 실리콘 밸리의 최초 업체다. 이 회사는 당시 보편화된 유선 통신망인 전보를 장악했던 ‘웨스턴유니온’에 맞설 무선 기술을 개발했다. 서부 본사에서 중부를 거쳐 동부로 망을 확대하려던 사업은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1912년 중서부의 잦은 뇌우가 전파 방해를 일으켜 통신을 자주 두절시켰다. 고객들은 대거 이탈했고, 회사는 위기를 맞았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페더럴텔레그래프는 이듬해 미 해군의 파나마 운하 지대에 무선 기지 건설 계약을 따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미국은 해외에 확보한 자산을 관리해야 했는데, 의회는 이를 위해 무선기지 설립을 승인했다. 덕분에 운하 지대를 비롯해 하와이·푸에르토리코·필리핀 등지에 장비 수요가 늘면서 새 기지 사업은 이 회사와 같은 신생 통신사들의 좋은 수입원이 됐다. 

안정적인 정부 물량으로 기반을 닦은 페더럴텔레그래프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또 미국이 산업 외교전을 펼치는 데도 뛰어들었다. 페더럴텔레그래프가 미 국무부와 계약해 중국 정부에 통신망을 깔아주는 대가로 1920년대까지 지원받은 자금은 1300만달러에 이른다.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휴렛패커드’(HP)의 탄생에도 정부 지원이 숨어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무선전파 방해작전에 참여한 프레더릭 터먼은 이후 스탠퍼드대 교수로 재직하며 재원을 끌어왔고, 제자들이 1939년 회사를 창업해 이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1950년대 생겨난 반도체기업들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초창기 5년간 정부의 방위산업 계약분만 공급했던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직원들은 향후 ‘인텔’을 세운 주인공들이 됐다. 비슷한 시기 ‘베리언어소시에이츠’는 정부에 항공우주 연구용 극초단파, 진공관 기술을 제공하면서 돈을 벌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을 중심으로 한 국방·우주 분야 투자가 본격화됐던 1960년대, 미 정부는 밸리의 기업들이 개발한 가장 비싼 집적회로(IC) 컴퓨터 칩을 사가는 고객이었다. MS와 IBM에 이어 세계 3위 하드·소프트웨어 제조사 ‘오라클’ 역시 1977년 밸리에서 상대한 첫 고객이 미 중앙정보국(CIA)이었다. 캘리포니아대 마틴 케네디 교수는 “서캘리포니아에 밸리가 형성되던 시절, 연방정부는 가격에 민감하지 않은 최고의 고객이었다”고 블룸버그에 설명했다.

미 국방부 산하 국방첨단연구기획국(DARPA)이 핵무기 공격에서 살아 남기 위한 네트워크 망을 만들려고 투자한 기술은 오늘날 인터넷의 바탕이 됐기도 했다. 인벤시아 역시 2009년 기획국의 지원을 받아 창업한 곳이다. 신생 기술업체들은 사업 기회와 방대한 자원을 정부에서 끊임없이 제공받아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키웠다. 결국 이 같은 정부의 역할이 현재의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탄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밸리와 정부가 반목하던 시기도 있다.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클리퍼 칩’을 고안하라고 기업들을 압박했다. 이는 국가안보국이 고안한 통신 암호화 칩으로, 클린턴은 이를 정부가 제조·관리하려 했다. 당국의 영장발급 절차를 거쳐 기업 통신 기록을 해독하는 길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민자유단체들과 애플·MS 등 첨단 기업들이 암호화가 풀리면 보안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나서 정부는 결국 계획을 포기했다.

이후 정치권은 밸리의 힘을 장악하려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1999년 CIA 등 정보 당국이 모여 벤처캐피털 ‘인큐텔’(In-Q-Tel)을 만든다. CIA가 주 고객인 정보분석업체 ‘팔란티르 테크놀리지스’도 여기서 200만달러의 자본을 받아 설립됐다. 보안업체 ‘파이어아이’도 마찬가지다. 인큐텔에서 일했던 한 기술자는 “정부는 이 기업들에 특별한 기능을 추가한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뒤 그만큼 대가를 추가로 지불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정부 일거리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실리콘 밸리가 정권을 상대로 한 영업을 끝낸 것은 아니다. 특히 미 정부는 최근 몇 년간 사이버안보에 열을 올리면서 더 적은 돈으로 빠르게 기술벤처업체를 창업할 수 있는 신속심사(패스트트랙)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신생 기업에 투자를 늘리고, 군·정보당국 출신 인사를 이들 업체의 이사진으로 포진시킨다. 또 기술업체 고위 경영진과 인맥을 쌓는다. 모두 첩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시킬 기반을 만드는 작업이다. 예산 분석기업 ‘델텍’에 따르면 2010년도엔 86억달러였던 연방정부의 사이버안보 관련 지출은 내년에 119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 벤처기업에 투자 후 정부인사 포진시켜 첩보임무 수행


1990년대 미 합동참모본부 요원이었던 조웰 하딩은 “몇 년 전 당국이 해외 감시를 위한 컴퓨터 칩을 설치하는데 기술기업 감독관에게 5만달러를 지급했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스노든에게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MS는 자사 클라우드 서비스 ‘스카이드라이브’에 프리즘을 연동해 국가안보국이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연방수사국(FBI)과 협력해 기술을 개발했다. 클라우드는 이용자들이 개인 하드웨어 대신 기업 저장망에 자료를 올릴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보안업체 ‘맥아피’의 최고기술전문가(CTO) 스튜어트 매클루어는 “당국은 기업에 소프트웨어의 코드를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알면 프로그램의 취약점을 찾아낼 수 있고 이를 다른 곳에 설치하면 침투용으로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 고객이 아직 알지 못하는 취약점을 정부가 미리 알게 되면 이를 방어용으로 쓸 수도 있지만 개인 사생활을 침해하는 불법적인 용도로 악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또 다른 사이버보안기업 ‘맨디언트’의 데이브 드왈트 최고경영자는 “취약점뿐 아니라 프로그램 설계 부분의 잠재적 위험 역시 정부와 공유한다”고 말했다.

프리즘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이 감시 대상에 포함된 데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외교 갈등으로 확산될 우려도 커졌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전문 스파이 기술이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지난달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세계적 전자감시 기술업체들을 불러 무역박람회를 주최한 제리 루카스는 “도의적 책임을 요구하며 감청 개입 등을 비판하는 여론은 산업을 흔들지 못한다”며 “(정부의 기술) 요구는 더 커지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그는 “미국은 감시 기술에 가장 큰 예산을 맞춤형 감시 시스템을 대형 미국 기업에서 사들이는 경향이 있다”며 “이 때문에 미국의 신생 기술기업들은 정부의 투자를 바탕으로 시작해 해외 진출 의욕이 없다”고 말했다. 실리콘 밸리와 정부의 관계는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 “감시 수준 낮추거나 아예 중단하려는 정부는 없다”

루카스는 유럽 기술 기업들이 경찰과 정보당국을 상대로 영업할 장을 마련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 업체들은 복잡하게 설계된 인터넷과 통신 감청 용품에 대한 비공개 설명회를 열었다. 이탈리아의 감청 소프트웨어 개발사 ‘해킹팀’은 자신들의 원격 스파이웨어가 메신저 등의 암호화된 통신도 뚫을 수 있어 경찰이 웹캠을 감시하는 데도 쓸모가 있다고 소개했다. 독일의 ‘트로비코르’는 자신들의 기술로 대규모 정보기록을 다루는 비법을 요원들에게 교육했다. 영·독 합작사 ‘감마 인터내셔널’은 원격으로 휴대전화 통신을 감청하는 스파이웨어 ‘핀피셔’를 홍보했다.

그러나 이제 글로벌 업체로 성장한 서방의 첨단 기업들은 모국 정부와의 유착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과거 MS에서 일했던 한 전직 정보 요원은 “주요 시장인 중국에서 정보를 우회해 빼내는 ‘백 도어’를 몰래 설치한 것이 발각되면 이에 따른 위험이 너무 크다”며 “MS는 미국 기업이기는 하지만 여러 국가에서 보조를 받아 세계 시장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국제 기업”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제3자를 끼고 이들 기업과 일을 추진하기도 한다. ‘공모’가 드러났을 때 기술업체를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기술이 시리아와 북한 등 소위 ‘블랙리스트’ 국가로 넘어갈 위험도 있다.

프라이버시인터내셔널연구소의 에릭 킹 대표는 “기업이 합법적으로 정부 감시 활동을 돕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법적인 효용성이 적용될 때만 그나마 가능하다”며 “감시 수준을 낮추거나 아예 중단하려는 정부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