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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이슈

[김보미의 도시&이슈] 아프리카 ‘작은 로마’ 아스마라···식민지도시가 ‘현대건축’ 실험장으로

by bomida 2017. 7. 24.

아스마라의 주유소 피아트탈리에로 빌딩. 항공기를 본떠 지지대 없이 양쪽 각 15m 길이 날개 모양 

콘크리트 지붕을 얹었다. 위키피디아


 아르데코의 색채가 물씬한 영화관. 절충주의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하우스. 신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신고전주의 건축을 따른 대통령궁.

 홍해 연안 동아프리카 작은 나라, 에리트레아의 수도 아스마라는 1930년대 건축가들이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설계를 현실로 구현한 도시다. 해발 2300m 고지대, 서울 서초구와 비슷한 크기의 땅엔 이탈리아식 건물 400여채가 가득차 있다. 유네스코가 지난 7일(현지시간) 현대건축의 도시, 아스마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도시 전체가, 그것도 현대적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처음이다.

 아프리카 소국의 수도가 ‘작은 로마’로 불리며 20세기 초 유럽에서 꽃피웠던 모던 건축의 상징적 도시가 된 데는 오랜 식민의 역사가 맞물려 있다.

 아스마라는 1889년 이탈리아가 에리트레아를 점령한 뒤 1897년 수도로 정하고 1911년 항구도시 마사와와 철도로 연결하면서 본격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야자수와 사바카 나무를 양쪽으로 가지런하게 심은 넓은 도로, 기능별로 구역을 나눠 정비된 골목뿐 아니라 광장과 카페들까지 모두 계획에 따라 들어섰다. 특히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에 제2의 로마 제국을 세우겠다며 1935~1941년 아스마라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에티오피아 침공에 대비해 에리트레아로 넘어온 이탈리아인들이 막 새로 지어진 이 도시에 정착했다. 1939년 거주민 9만8000명 중 이탈리아인이 절반이 넘었다. 에리트레아에 사는 이탈리아인(7만5000명)의 70%가 아스마라에 있었다.

 이 때 건축가들이 로마에선 규제와 비용 등 한계에 부딪혀 구상으로만 남겨 뒀던 설계도를 들고 이 도시로 찾아들었다. 아스마라는 현란하고 기상천외한 현대건축물을 집대성하는 실험장이 됐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 주유소로 지어진 피아르 탈리에로(Fiat Tagliero) 빌딩이다. 항공기를 본따 설계했는데, 중앙에 사무동 타워를 두고 양쪽으로 각 15m짜리 날개 같은 지붕이 얹혀있다. 콘크리트 지붕은 지지대를 사용하지 않고 힘의 분산을 이용해 설계한 캔틸레버식 구조물이다. 미래파 건축가의 설계안을 본 당국에선 안전을 우려해 기둥을 추가하라고 요구했지만 건물은 1938년 설계대로 완공됐고, 8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다.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의 시네마임페로 극장. 전기회로판에서 외관을 본뜬 건물은 

아르데코 디자인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아스마라 | AP연합뉴스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의 오페라하우스 내부. 절충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극장 천장에는 

춤추는 소녀들이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의 세계은행건물. 세계은행이 에리트레아 본부 사무실로 사들이면서 이름이 붙었다. 1938년 지어진 이 건물은 아트데코와 미래파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구현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위키피디아



 다른 거리엔 전자기기의 회로판에서 영감을 얻은 외관을 만든 영화관 시네마 임페로(Cinema Impero)가 있다. 지금도 영화를 상영 중인 이 극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둘러진 볼링장은 대표적인 아르데코 건축으로 꼽힌다. 오페라하우스는 절충주의를 실험했다. 건물을 두른 기둥엔 사자머리 석상과 파인애플이 새겨져 있고 내부 천장엔 춤추는 소녀가 그려져 있다. 입체주의 주택으로 꼽히는 아프리카펜션(Africa Pension)과 신로마네스크 풍의 로사리오 성모교회도 있다. 1938년 지어진 세계은행건물은 세계은행이 본부 사무실로 사들여 이름이 붙었는데 아르데코와 미래파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구현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우체국과 시청, 정부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주민들이 일상을 보내는 식당과 가게까지 이탈리아식 건축물로 모두 당시에 지어진 것이다. 스파게티나 피자를 파는 가게와 오래된 이탈리아 커피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카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 도심에는 이탈리아식 식당과 오래된 이탈리아 커피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카페들도 많다.panoramio 


  그러나 도시의 현대화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멈췄다. 1952년 유엔이 에티오피아연방을 만들면서 수도 지위도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넘겨줬다. 이후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에 맞서 오랜 전쟁 끝에 1991년에야 독립했다. 30년간 이어진 전쟁에도 고지대였던 아스마라는 크게 파괴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건축물들을 지켜낸 것은 에리트레아의 정체였다. 런던대 바틀렛 건축대 강사인 에드워드 데니슨은 “리비아와 소말리아와 같은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은 식민 지배의 유산을 도시를 개발하면서 청산해버렸지만 연이어 이탈리아, 영국, 에티오피아의 통치를 받은 에리트레아는 이 과정이 점진적이어서 건축물들이 잘 보존된 상태로 남아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유네스코는 아스마라를 “20세기 시작된 초기 현대도시를 구현한 이례적인 예”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사실 에리트레아가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일은 드물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이 독립 이후 26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는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린다. 
 유엔 인권조사위원회는 “지난해 강제 징집과 투옥, 고문 등으로 30만~40만명이 수용소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고발했다. 프리덤하우스는 북한·사우디와 함께 최악의 인권국가로, 국경없는기자회는 북한보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곳으로 꼽기도 했다.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생산량(GDP)은 1350달러에 한달에 4000~5000명씩 먹고 살기 위해 유럽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