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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자 경멸했던 트럼프, 기밀 폭로자 되다

by bomida 2017. 6. 4.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른 전쟁에 대한 기밀을 폭로했던 첼시 매닝이 지난 17일(현지시간) 캔자스주 포트레븐워스 군교도소를 출소했다. 간첩법 위반과 절도, 군규정 위반 등 20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수감된 지 7년 만이다.

바그다드에서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미군의 동영상을 비롯해 국무부 외교문서 등 75만건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위키리크스에 넘긴 매닝은 당시 스물두 살 육군 일병이었다. 미국의 잔혹한 전쟁범죄를 세상에 알려 내부고발의 힘을 보여줬지만 35년형을 선고받았다. 올 1월, 임기를 사흘 남겨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매닝이 사회에 진 빚을 갚았다”며 “(지금까지 수감으로) 정의가 이미 실현됐다고 생각한다”며 감형을 결정했다. 매닝의 변호인단은 이에 “미군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군사기밀을 공개한 병사의 안위를 고려한 최초의 사례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29일 취임 100일을 맞아 미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열린 지지자 집회에 참석한 뒤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워싱턴 AFP연합뉴스


트럼프, 오히려 보도한 기자 구속 요구

수감기간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며 성전환 치료를 받아 청년 ‘브래들리’에서 ‘첼시’라는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 매닝은 개인적인 사연만큼 국가의 기밀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파장을 일으켰다.

매닝의 석방이 달갑지 않은 이들 중 한 명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오바마가 감형을 결정하자 트럼프는 “결코 석방돼서는 안되는, 배은망덕한 배신자”라고 트위터를 통해 비난한 바 있다.

러시아 언론 한 곳에만 취재를 허용해 ‘수상한 만남’으로 불렸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세르게이 키슬랴크 러시아 대사와의 회담에서 동맹국과도 공유할 수 없는 민감한 테러 기밀을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탄핵론까지 대두된 트럼프는 매닝의 이번 석방에 대해서는 아직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트럼프는 국가기밀 누설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특히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도청·감청 실태를 폭로하고 러시아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에 대해서는 “배신자”라며 수차례 경멸을 표시했다. “중국과 러시아에 국가의 중요한 정보를 넘긴 스노든은 처형돼야 하는 반역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 스캔들’로 기밀 유출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러시아와 테러, 항공 안전에 관한 사실을 공유하고 싶었으며 나는 그럴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협의 내용은 적절했고 외교에서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정보가 국가기밀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을 환영하며 악수하고 있다./러시아 외교부


미국 대통령은 광범위한 국가정보를 관리한다. 1988년 해리 블랙먼 전 법무장관은 “국가 안보와 관련한 정보를 공개할지 여부, 정보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권한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권력에서 나온다. 의회의 승인과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대법원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대통령이 국가기밀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이라고 는 전했다.

그러나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 언론은 이번 사태로 정보원이 위험에 빠졌으며 외교적 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맥매스터 역시 “조정과 협력을 바탕으로 공유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라며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트럼프와 라브로프의 대화 기록을 의회에 제출하라고 촉구한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정확히 무엇을 말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충분한 설명이 이뤄질 때까지 미국인들은 대통령이 국가기밀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은 이번 문제를 대통령의 정보 유출보다 언론 보도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삼고 있다. 보도를 통해 기밀이 알려지는 것이야말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폭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보원 목숨 위태로워졌다”

러시아 관련 수사를 진행하다 해임된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메모를 보면 트럼프는 맬컴 턴불 호주 총리와 대화한 내용이 기사화된 것을 비판하며 “이를 보도한 기자들을 구속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선거운동 과정에서 불거진 커넥션 의혹을 보도한 기자들의 구속방안 검토도 언급했다.

이번에도 트럼프가 러시아 외교관들에게 “이슬람국가(IS)가 노트북을 이용한 항공기 테러를 준비 중”이라고 알렸다는 세부 내용이 보도되면서 국가의 정보능력을 해칠 수 있다고 백악관은 경고했다. 대통령이 기밀을 다른 이에게 말했다고 해서 해당 정보가 공개 가능한 상태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쟁 기밀을 위키리크스에 폭로해 35년형을 선고 받은 첼시 매닝의 출소를 앞두고 지난 1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환영 문구를 들고 집회를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AFP연합뉴스


미국과학자연맹(FAS)의 국가기밀 담당인 스티븐 애프터굿 국장은 “국가기밀은 서면을 통한 공식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 비공개 보안규정이 해제될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안보 전문인 마크 자이드 변호사 역시 “사적인 만남에서 공유된 정보라고 해서 기밀이 해제되는 것이 아니다. 신문에 실렸다는 사실만으로 당국의 승인 없이 공개 가능한 정보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시 정보공유가 이 같은 고도의 정치·외교적 함의를 계산하고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맥매스터 보좌관의 해명을 보면 대통령은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도 보고받지 않았다. 해당 정보는 이후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이스라엘이 미국에 넘긴 것이라는 점도 알려졌다. 트럼프가 러시아 측에 정보를 전달한 것은 충동적이며, 불러올 파장에 대한 이해 없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날 회동을 아는 관계자는 “트럼프는 ‘내겐 엄청난 정보가 있다. 매일 사람들이 대단한 정보를 브리핑해준다’며 자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국가기밀을 폭로해 경멸의 대상으로 꼽은 스노든은 이번 사태를 둘러싼 ‘아이러니’한 감정을 트위터에 남겼다. 그는 “다음에 누가, 헌법을 위반하고 정도를 넘어선 대규모 감시를 폭로한 기사를 찾으면 이걸 보여줘야겠다”며 트럼프가 러시아에 정보를 넘긴 것을 폭로한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함께 달았다. 자이드 변호사는 “이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 중 하나는 트럼프”라며 “그는 국가안보기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IS의 테러 계획을 수집한 이스라엘 정보원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동안 테러와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미국과 정보를 공유해 왔던 우방국들의 우려도 잇따른다. 유럽의 한 정보기관 고위 당국자는 “트럼프가 러시아에 기밀을 넘긴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정보원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내부 정보 공유를 중단할 수 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CNN은 “최근의 사태는 트럼프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던진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