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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이슈/서울이야기

“동네 불 꺼지고 나서 알았죠…상인 있어야 건물주도 있다는 걸”

by bomida 2015. 12. 25.





“이대 뒷골목은 영원할 줄 알았죠. 잊혀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숙촌이 의류·미용 상가로 뜨기 시작하면서 가게를 구하는 상인이 줄을 섰다. 임대료는 저절로 올랐다. 2000년대 온라인 쇼핑몰에 밀리면서 다시 잊혀졌다. 90여개 달하던 가게 중 30곳이 문을 닫았다. 토박이 건물주들이 머리를 맞댔다. 사람들이 다시 찾는 골목으로 만들어보자고…

ㆍ“5년 동안 임대료 안 올립니다” 이대 뒷골목 건물주들의 약속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대 뒷골목. 29채의 건물이 들어선 골목길에 한두 해 전부터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골목의 숨통이 트이면서 건물주들은 약속을 하나 했다. 앞으로 5년간 임대료를 올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 200m 남짓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건물 29채가 줄지어 선 동네가 있다. 과거 한옥이 빼곡한 거주지였다가 1950~60년대 하숙촌이 됐고, 1980년대부터 이화여대 앞 의류·미용실이 늘어나면서 상가들이 들어선 곳이다. 독특한 디자인의 옷들을 많이 갖춘 집들이 모여들자 ‘옷 좀 입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만 찾는 골목’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골목을 지나려면 어깨를 수십번 부딪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이대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 좁은 길들이 이어진 뒷골목에 점포가 90여개나 생긴 것이 이즈음이다.

지난 9일 대현동에서 만난 김광희씨(63)는 “당시는 세입자들이 명절에 선물까지 가져와서 (임대)계약만 연장해 달라고 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60여년 전 부모님이 이곳에 터를 잡고 지은 집에서 성장한 그는 이제 상가로 바뀐 건물의 주인이다. 그는 “(세입자들이) 제발 장사만 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고 가게 구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말했다. 수요가 늘어나니 값은 뛰었다. 임대료는 계속 올랐고, 상인들은 10~13㎡(3~4평)짜리 가게에 권리금을 1억원씩 얹어 주고 들어왔다. 가로등 하나 없어도 점포 불빛만으로 어두울 새가 없는 골목이었다. 김씨는 “그땐 영원할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언제 임대업을 해본 적이 있나요. 다 처음이었잖아요. 더 준다는 상인이 나타나니 더 받은 거죠.”


동네에 불이 꺼진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온라인 쇼핑몰이 급증하면서 이대앞을 찾던 이들이 인터넷을 검색해 옷을 샀다. 이대앞 옷들은 차별성을 잃었고, 한 번 등돌린 소비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둘 장사를 접어 30개가 넘는 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동네는 쇠락해갔다. 상점 문이 닫힌 어두운 골목은 밤이면 지나가기에도 무서운 곳으로 변했고 임대료는 반토막, 반의 반토막이 났다.


그렇게 6~7년간 잊혀졌던 이대 뒷골목에 새로운 가게들이 생겨나고 있다. ‘곧 문을 연다’는 현수막이 걸린 가게 안쪽을 보니, 벽을 새로 칠하고 간판을 다시 다는 집이 여기저기 보였다. 이대 조형예술학과 학생 20여명이 차린 액세서리 공방도 문을 열었다.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온 일식집과 맥주집이 새로 생겼다. 시를 낭송하고 같이 글을 읽는 문학다방 ‘봄봄’과 음악을 배우고 고전을 이야기하는 ‘신촌서당’도 자리를 잡았다. 작은 쿠키 가게도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유명 요리사가 가게를 보러오기도 했다.

하나 둘 늘어난 가게들을 찾아 사람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진 건 한 두해 전이다. 건물주 18명이 이대골목주민연합을 만들어 ‘다시 사람들이 찾는 골목’으로 만들어보자고 머리를 맞대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골목에 위치한 건물 29채 중 26곳의 주인은 대를 이어 사는 토박이들이다. 예전 한옥집은 다세대로, 다시 상가로 바뀌었지만 꼭대기 층은 여전히 살림집인 경우가 많다. 중간에 매물로 나온 건물을 사들여 새로 건물주가 들어온 경우는 3채밖에 없다. 이것도 20년 넘게 골목에서 옷집을 하던 상인이 돈을 벌어 산 것이다. 건물주 가운데 18명이 뜻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앞, 뒷집 사는 마을주민이어서 가능했다.


대현동에서 태어난 공은숙씨(56)는 “대부분 여기서 40~50년씩 산 사람들인데 내 집(가게) 찼다고 (옆의) 빈집을 놔둘 수 없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내 건물에 세입자가 있어도 마을이 받쳐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더라. 골목에 다시 사람을 부르는 것은 결국 건물주, 우리 주민들의 몫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골목은 신촌이나 다른 이대 상권과 차이점이 있다. 다른 지역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상권이 뜨는 것과 맞물려 임대료가 오르면서 건물 값도 뛰었다. 비싼 가격에 매물로 팔려나갔다. 투자비가 높아진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렸고 결국 이를 감당할 프랜차이즈 점포들만 남게 돼 지역색을 잃어버렸다. 반면 이곳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월세가 낮아졌다. 토박이 건물주들은 공실로 둘 바엔 차라리 값을 낮춰 세입자를 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대 뒷골목이 다시 살아날 동력을 얻은 것은 이렇게 낮아진 임대료 덕이 크다. 서울 도심 상권 대부분이 임대료가 치솟으면서 작은 가게를 원하는 이들이 싼 월세를 찾아 이 골목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골목의 숨통이 트이면서 건물주들이 약속을 하나 했다. 앞으로 5년간 임대료를 올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뒷골목에서 25년간 옷장사를 하면서 건물을 산 홍진선씨(56)는 “골목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는 가게들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뜻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 “이곳은 이미 상권이 쇠락하는 걸 경험한 옛 번화가예요. 예전처럼 다시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해도 임대료는 그렇게 못 올려요. 겁나거든요. 그러다 장사 잘하던 상인이 가게 빼면 안되죠. 여기 사람들 대부분 그걸 압니다.”

동네를 ‘오래 장사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도 하고 있다. 건물주들이 서울시와 서대문구청을 찾아 다니며 어두운 골목에 가로등과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골목마다 도로포장도 새로 하고 전신주도 정리했다. 낡은 벽에는 그림도 그려 넣고, 나무를 화분에 심어서 모든 가게 앞과 골목 어귀마다 들여놨다. 내년 봄에는 담벼락에 넝쿨을 심고, 골목에 방치된 철도청 부지를 골목축제 등에 쓰는 방법도 궁리 중이다. 골목을 찾는 사람들에게 마을 역사를 들려준다거나, 가게 이정표를 만들자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골목에 다양성을 입히는 방법도 고민 중이다. 작은 점포들이 많은 동네의 특성을 살려 ‘주종목’인 옷집뿐만 아니라 이대 뒷골목만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상점들에 임대하자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홍진선씨는 “(프랜차이즈와 같은) 큰 점포가 들어온다고 하면 당장 수입은 크겠지만 결국 동네엔 득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김광희씨는 새로 들어올 가게 주인들은 골목을 바꿀 의지가 있는 상인들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상권은 생명이 있어서 이동하더라고요. 이곳도 잘 나갈 때는 이렇게 사람이 없어질 줄 몰랐잖아요. 공부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생물이에요. 그래서 절대 독식할 수 없고, 혼자서는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상인과 주민, 건물주가 같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