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 국제무역도시로 번성했던 마을에 불빛이 사그라들었다.650개가 넘던 가게는 10개도 남지 않았다. 상인과 주민들이 나섰다.1900년에 지은 ‘검은벽’ 은행을 유리공예박물관으로 변신시켰다.공장도 교회도 벽을 검게 칠하고 검은 기와를 올렸다.버려진 가게는 미술관·박물관·공방으로 꾸몄다.30년이 지난 지금, 이제 한 해 200만명이 마을을 찾는다.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검은벽’이 있다. 일본 오사카(大阪)와 나고야(名古屋) 사이 시가현(滋賀) 나가하마시(長浜市) 구도심 상점가에 있는 구로카베(くろ壁)다. 여기선 가장 흔한 색이 검정이다. 검은벽 위 지붕의 기와도 검고, 카페에선 검은 아이스크림도 판다.
일본 시가현 나가하마 구도심의 구로카베 스퀘어 초입에 서 있는 구로카베 1호점, 1900년대 은행으로 썼던 이 건물은 검은 회반죽으로 벽을 칠해 검은벽 은행으로 불렸고, 지금의 구로카베 상점가의 첫 점포가 됐다. 유리공예전시관이다.
좁은 골목들이 연결된 1.5㎢의 작은 공간에는 옛
건축물들이 줄지어 있어 마치 교토의 거리 같다. 유리로 만든 가로등과 길목 가게마다 진열된 유리제품들 때문에 이국적이기도 하다. 이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러 연간 200만명이 찾는다.
지난달 25일 아침에 찾아간 구로카베 스퀘어는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는 것은 골목 초입의 검은벽 건물이다. 1900년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건물로 지어졌다가 1906년 메이지은행으로 바뀌었는데,
검은 회반죽을 칠한 벽이 특이해서 ‘검은벽 은행(くろ壁銀行)’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지금은 유리잔부터 유리만년필, 유리시계 등 온갖 유리제품이
가득 찬 유리공예박물관으로 변신했다.
30년 전 이 검은벽 안에 유리제품을 채운 사람들은 나가하마의 토박이 상인과 주민들이다.
국제무역도시로 드높았던 명성이 사라진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장을 되살려보려는 간절함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나가하마는 400여년 전부터 번성했다. 지역 장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투를 도운 공으로 세금 없이 장사할 수 있는 도시가 됐다. 전국의 장사꾼과 돈이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고 한다. 산업화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 달에 20만명이 찾았다. 그러다 1970년대 유통환경의 변화로 재래시장이 침체되면서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650개의 가게가 있던 골목은 급속도로 텅 비었다. 100년 넘게 장사해 온 300개 점포의 상인들도 도리가 없었다. 번영했던 골목은 ‘한 시간에 사람 넷, 개 한 마리만 지나갈 정도’로 황량한 곳이 되었고 남은 가게는 10곳도 되지 않았다.
다시 마을을 일으키려 나선 건 지역 상인들이었다. 상인을 주축으로 하고 주민들이 힘을 보태 마을만들기 조직을 꾸렸다.
청년들도 모임을 만들어 어른들과 손을 잡았다. 장년층 주민들이 생선·채소 가게를 다시 열었다. 노인들의 일자리를 고민하는 모임도 생겼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생긴 주민 조직이 50개가 넘었다. 지역 유지들은 자금을 보탰다. 8개 기업이 1억엔 가까운 종잣돈을 내놓으면서 1985년 마을만들기
주식회사 ‘구로카베’를 만들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 돈을 가지고 텅 빈 골목에 나가하마의 전통 건물과 축제를 재건해보기로 했다. 다른 상권에선
볼 수 없는 유리공예도 해보기로 했다.
우선 마을 사람들이 좋아했던 검은벽 은행을 구로카베 시장의 공식 점포 1호로 만들었다. 유럽의 도시에까지 가서 공부하고 유리공예품들을 가져와
이곳에 전시했다. 골목의 다른 건물 벽도 아예 검게 칠했다. 200년 넘게 간장을 만들었던 공장과 버려진 교회도 검은벽 가게가 됐다. 골목이
입소문을 타면서 방문객이 늘었다. 자신감을 가진 주민들은 각자의 전공을 살려 버려진 가게를 미술관과 박물관 등으로 꾸몄고, 지역 예술가와
문인들은 공방을 차렸다. 옛 상인들이 즐겼던 마쓰리를 철마다 열고, 골목의 자투리 공간을 방치하지 않고 공원으로 가꾸었다. 주민들을
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호주로 기술유학을 보내고 100~200년 된 유리작품을 사다 전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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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노력은 통했다.
구로카베 점포를 연 지 4년 만에 연간 50만명이 시장을 찾았다. 시장만 돈을 벌면 안되겠다 싶어 주변까지 길을 내 걷기 편하게 바꿨다. 마을이
살아나자 거꾸로 유럽 작가들이 찾아오고, 시장의 빈집들은 하나둘씩 새 가게로 채워졌다. 구운 고등어에 소면을 곁들여 먹는 나가하마의 맛집,
야키사바소멘 식당 등이 생기고 유명 소고기집도 문을 열었다. 타지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유럽 음식점과 카페, 술집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300개 상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점포를 열고 싶어 기다리는 이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300개 점포 중 200곳의 주인은 외지인이다. 5년 전부터 대기업 브랜드도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장과 5분 거리인 나가하마역에는 대형마트도 생겼다.
구로카베 스퀘어 안에선 업종을 제한하지 않는다.
33㎡(10평)에 월 5만~7만엔 정도인 임대료도 요동치는 일 없이 안정적이다. 쓰러졌던 시장을 살려낸 상인·주민들이 초심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하지 않아도 이 공간을 만든 역사를 알리고 공유하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국산 기념품 가게, 구로카베와 어울리지
않는 점포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1998년 자체적으로 만든 마을만들기 사무소(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役場)는 구로카베 점포를
직접 운영하기도 하고, 마을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있는 이들이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25년간 35곳이 들어섰는데 미술관과
어묵집, 찻집, 전시관 등 종목도 다양하다. 관의 지원없이 시작해 장기간 재생력을 유지하는 소도시는 많지 않다. 구로카베 상점가는 업종의
다양성을 지키면서 상업뿐 아니라 지역 예술인들과 문화를 만들고, 신·구세대 조화를 이뤄 활력을 지키는 것이다.
주민들은 시장 운영에
필요한 인력은 모두 자원봉사로 충원하고, 필요한 자금도 직접 조달한다. 점포 수익과 연간 100만장을 발행하는 시장 지도의 광고수익 등으로
1년에 1200만엔을 시장에 투자한다. 마을만들기 사무소 사사하라 시로 이사장(74)은 “60~70대 주민·상인들이 시작한 마을만들기를 다음
세대가 이어서 하고 있다. 20년 전 만든 사무소도 나가하마를 홍보하려는 주민들이 직접 꾸린 것이다. 마을만들기는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히가시오사카의 마을·학교 교류… 공업지역 특성 살린 공장 수학여행 주목
일본 오사카 동쪽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의 중심지인 신이시키리역 주변 주택들은 1층에 작은 공장들이 있고 2층은 살림집이다. 부품제작, 가내수공업을 하는 소규모 기업들이 이 같은 형태로 몰려 있다보니 전국에서 공장밀도가 가장 높다. 오랜 기간 공업지역이었던 이곳에 최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이다.
공장지역 여행은 동네 작은 호텔에서 시작됐다. 10여년 전 40억엔의 부채를 떠안고 파산한 세이류 호텔이다. 회사를 살리려고 종업원들이 빚을 내 호텔을 사들였다. 그러자 지역 업체들은 망한 거래처인데도 계속 물건을 납품해주고 계약도 이어갔다. 호텔 직원들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학교와 공장의 교류다.
인구 50만명의 소도시 히가시오사카엔 기업이 2만개가 넘는다. 넷 중 하나는 제조업이다. 직원은 한 명에서 많아야 네 명인 곳이 대부분이지만 공장들의 기술을 합치면 칫솔부터 전기차, 로켓까지 만들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일본 칫솔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되고, 사장들이 모여 만든 우주개발협동조합은 인공위성도 쏘아올렸다. 작지만 기술력을 무기로 버텨온 공장이 한때 1만2000개나 됐다. 하지만 제조업을 기피하고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이 줄면서 공장 수가 6000개 이하로 반토막 났다.
호텔 직원들은 이 점에 착안했다. 청소년들이 공장에서 장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체험도 하는 ‘물건만들기(ものづくり)’를 여행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때마침 경험(キャリア) 교육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유행이 불면서 학교들의 반응이 좋았다. 2008년부터 많으면 하루 600명, 연간 6000명의 학생이 공장에 왔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사장이 직접 부품을 설명하고 제품을 만들어봐야 하기 때문에 공장문을 하루 닫아야 한다. 공장 한 곳이 연평균 5억엔 정도를 버니까 하루 200만엔, 시간당 약 25만엔의 손해가 나는 셈이다. 학생 한 명당 수고비 조로 1000엔 정도를 지급한다.
하지만 공장 70곳이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30대 젊은 사장부터 85세 최고령 사장까지 여기에 참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에게 기술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한 스테인리스 공장은 연간 60번 견학생을 받기도 했다. 오사카 모노즈쿠리관광추진협회 전무이사인 아다치 다쓰미는 “3D 업종으로 기피 대상이 된 제조업을 경험한 학생 중 기술을 배워보고 싶다는 아이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큰 성과”라며 “견학이 잦아진 후 오래된 공장 부지를 청소하거나 사장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정리하고 발표연습을 하는 변화도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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