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서울시, 남산 통감관저 터에 가장 치욕스러운 방식 복원
경술국치의 슬픔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900년,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주한 일본공사로 조선에 왔다. 그 후 7년간 우리 땅에 머물며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듬해인 1906년 일본은 남작의 작위를 내렸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동상까지 세워줬다.
이완용이 3대 조선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강제병합 조약을 맺은 통감관저가 있던 바로 그곳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섰다. 동상을 받치고 있던 돌의 높이만 2.5m가 넘는다.
경술국치의 슬픔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900년,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주한 일본공사로 조선에 왔다. 그 후 7년간 우리 땅에 머물며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듬해인 1906년 일본은 남작의 작위를 내렸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동상까지 세워줬다.
이완용이 3대 조선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강제병합 조약을 맺은 통감관저가 있던 바로 그곳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섰다. 동상을 받치고 있던 돌의 높이만 2.5m가 넘는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시가 받침대 역할을 했던 비석 가운데 전면부 비석을 원래 있던 자리에 거꾸로 땅에 박기로 했다.
서해성 서울시 광복70주년기념사업 예술총감독은 12일 “통감관저 터는 나라가 망한 자리에, 나라를 뺏은 일본 합방의 3대 영웅으로 불렸던 이의 동상이 생긴 역사적 장소”라며 “그곳에 가장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복원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기념식은 경술국치일인 오는 22일 열린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동상을 받치고 있던 비석이 원래 있던 서울 남산 통감관저터에 복원된다. 바닥에 거울처럼 상이 비치는 검은 돌(오석)을 깔아,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써진 글씨가 거꾸로 보이게 했다. (상상도)
서해성 서울시 광복70주년기념사업 예술총감독은 12일 “통감관저 터는 나라가 망한 자리에, 나라를 뺏은 일본 합방의 3대 영웅으로 불렸던 이의 동상이 생긴 역사적 장소”라며 “그곳에 가장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복원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기념식은 경술국치일인 오는 22일 열린다.
남산 자락에 위치한 통감관저 터는 과거 일본인들이 모여 살아 왜성대(倭城臺)로 불리던 곳이기도 하다. 하야시 동상의 좌대는 2005년 처음 발견됐다. 이 동상을 만드는 데 지원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뒤판은 사라졌고, 전면과 양 옆면 비석들만 흙바닥에 눕혀진 채 방치돼 남산 방문객들이 의자처럼 쓰고 있는 상태였다.
10년 전 최초 발견 당시에는 이를 보존할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 복원 작업은 이뤄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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