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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기행] 싱가포르 하지레인의 ‘불금’

by bomida 2016. 5. 24.



통제로 만든 싱가포르? “다양한 민족 함께 살기 위한 규칙”


야간 금주령 속 해방구 ‘하지레인’…자유에 취한 걸까, 목마른 걸까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비행기가 창이국제공항에 다다르자 승무원은 착륙 안내와 함께 마약에 대한 경고방송을 하며 입국신고서를 확인하라고 했다. 신고서 뒷면엔 ‘국내법에 따라 마약밀수는 사형’이라는 영어 경고문이 굵고 빨간 글씨로 찍혀 있었다.


공항을 나와 시내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도 경고가 이어졌다. 담배를 피우면 벌금 1000싱가포르 달러(약 85만원), 비상벨을 잘못 누르거나 화기(火器)를 소지한 경우엔 5000싱달러(426만원), 차량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마셔도 500싱달러(42만원)를 물린단다. 몹시 목이 말랐지만 가방에 든 물병을 꺼낼 수 없었다. 길을 걸을 때에도 경고는 계속됐다. 침을 뱉으면, 쓰레기를 버리면, 비둘기나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면 벌금 1000싱달러다.


안전하고 깨끗한 싱가포르를 위해 치르는 대가는? 싱가포르의 잘 닦인 도로와 스카이라인. 싱가포르의 주거는 주택개발청에서 공급하는 아파트로 70%가 충당된다. 국민들은 장기 저금리 대출 같은 혜택을 통해 싼값에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벌금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쇼핑몰에서 공중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으면 150싱달러를 내야 한다. 호텔 회전문에는 독특한 향이 있는 과일 두리안을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가, 아파트 복도에는 스케이트보드와 자전거를 타면 안된다는 빨간 경고판이 붙어있다. 듣던 대로 벌금의 나라,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 입국 신고서 뒷면에 적힌 “마약 밀거래시 사형” 경고문.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 지하철에 적힌 벌금 경고. 담배를 피우다 들키면 1000싱가포르달러, 음식이나 음료수를 먹으면 500싱달러, 화기 소지시 5000싱달러의 벌금을 물 수 있다. 냄새가 지독한 과일 두리안은 벌금은 없지만 공공장소인 지하철에 가지고 탈 수 없다. 지하철 비상출입문 손잡이에는 잘못 사용하면 5000싱가포르달러의 벌금을 물 수 있다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경고문은 영어와 중국어(만다린), 말레이어, 힌디어(인도어)로 적혀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 오차드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면 1000싱가포르달러의 벌금 경고판이 서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서울보다 조금 넓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수식어를 갖고 있다. ‘아시아 최고의 금융도시’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국가경쟁력 세계 2위 나라’ ‘전 세계 7000개가 넘는 기업들이 지사를 만든 기업하기 좋은 도시’ ‘동·서양에서 이민을 떠나 살고 싶어하는 나라’.


싱가포르의 인구는 567만명, 면적은 700㎢를 조금 넘는다. 구매력 기준 1인당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8만5700달러였다. 가난한 어촌에서 반세기 만에 부국(富國)이 된 싱가포르, 빈틈없는 주민 통제 속에서 안전과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 어떤 이들은 싱가포르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유리장 속의 행복’이라고도 부른다. 세월호 참사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꾸게 된다. 생존, 안전, 번영 같은 것들은 행복의 기본 전제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싱가포르는, 적어도 그 나라 국적을 갖고서 모든 규제 틀 안에 머물며 번영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나라’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자유와 민주주의, 인간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가 행복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자유는 ‘어느 정도’일까.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를 보면 옆의 부모도 크게 말하고 있어요. 유전인자가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교육을 받은 싱가포리안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습을 하면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거든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쇼핑몰 비보시티에서 만난 조이(42)에게 벌금 얘기를 꺼냈더니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친구 엘리세(40)도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라며 거들었다. “다양한 국적과 계층이 섞인 작은 도시임을 기억해야 해요. 어느 사회에나 규칙이 있잖아요. ‘숨도 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초교육 같은 거죠. 불편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지키면 되니까요. 덕분에 깨끗하고 안전한 도시로 유명해졌고, 질서가 잡혀 살기도 편하고요.”


싱가포르 트럭 뒤에는 최대치로 실을 수 있는 용량표시와 함께 사람인원수도 적혀있다.(왼쪽) 말레이시아 등에서 트럭 짐칸에 올라타 출퇴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오른쪽) 차의 크기에 따라 인원수를 제한하는 규제를 만든 것이다.싱가포르|김보미 기자 



■“불편하지 않아요, 안전하니까요”


싱가포르는 주민 10명 중 4명이 영주권자를 포함한 외국인이지만 영어가 공용어인 까닭에 어디서나 누구와든 말이 통한다. 인구의 74%인 중국계와 13%인 말레이시아계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기네들 말을 쓰지만 직장과 학교에서는 영어가 먼저다. 힌디어, 타밀어를 쓰는 인도계(9%)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한국, 일본 등 다른 민족들(3%)도 각자의 말이 있지만 공식석상에서는 영어를 쓴다. 하지만 식당가에서는 제각각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전 세계 은행과 증권사의 지사들이 밀집한 보드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세계화된 ‘금융맨’들의 지역이지만 점심 시간에는 같은 민족끼리 고국 음식이 담긴 도시락을 사서 사무실로 향한다. 먹을 때만은 입맛대로, 가장 편한 언어를 쓰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벌금은 다양성이 사회에 불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시스템인 듯했다. 벌금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규칙이라는 주장에 10여년 전 이민 온 영주권자 사라(42·가명)도 맞장구를 쳤다. 오차드 거리에서 만난 그는 “치안 좋고, 공기 맑고, 우수한 학교가 있다. 행복하게 사는 데 핵심인 세 가지 아닌가”라고 말했다.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외국기업이 내는 법인세는 낮춰도 민생 관련 정책은 철저히 자국민 중심인 싱가포르에서는 외국인의 주거비와 학비 부담이 어떤 도시보다 큰 편이다. 외국인은 주택개발청(HDB)이 만든 저렴한 공공아파트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콘도미니엄을 사거나 빌려야 한다. 도심의 수십억원짜리 콘도는 차치하고, 방 하나에 욕실과 부엌을 함께 쓰는 콘도만 해도 교통이 편리한 위치라면 월세가 1500싱달러(약 130만원) 수준이다. 땅이 좁기 때문인지 주택 규제는 엄청나다. 시민권자만 주택을 분양받을 수 있고, 5년간은 매매가 금지된다. 그러니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내국인들뿐이다. 학비도 마찬가지다. 싱가포르국립대(NUS)의 등록금은 연 1만5000싱달러이지만 외국인은 3배인 4만5000싱달러를 내야 한다.


사라는 그래도 싱가포르에서 계속 살 것이라고 했다. “밤 늦게 밖을 걸어다닐 수 있잖아요. 부동산 거래 내역이나 범죄자 얼굴이 모두 신문에 공개돼요. 외국인도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투명하게 알 수 있는 거죠. 벌금은 상관없어요. 안전하잖아요.”


중국인 부모를 둔 조이(왼쪽)과 말레이 출신 부모님을 둔 엘리세.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로 대화하지만 두 사람이 있을 때는 만다린(중국어)로 이야기를 한다.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 주롱리저널도서관에 여러 신문들이 진열돼있다. 최대 일간지 스트레이츠타임즈 외에도 중국과 인도 등 여러 나라 말로 된 신문들이 비치돼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금융회사들이 모여 있는 싱가포르의 보드키 지역에서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사가지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 함께 사는 곳이지만 식사를 할 때는 같은 지역 출신끼리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자국 음식을 먹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에서 인도 출신 가족이 사진을 찍고 있다.싱가포르|김보미 기자


필리핀에서 온 맥론(31)은 싱가포르가 “기회의 땅”이라고 했다. 유학을 마친 뒤 돌아가지 않고 교직원으로 취직했는데, 앞으로 자리를 잡으면 동생들도 데리고 올 생각이다. “같은 동양인이어서 인종차별도 없고, 영어를 쓰는 데다 선진국이잖아요. 일자리도 많고, 외국 대학 분교도 있으니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이들은 규칙에 매인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삶에 만족한다는 대답도 한결같았다. ‘강한 정부’가 만들어낸 구조가 적어도 주민들의 동의 속에 운영되는 셈이다.


■인생 경로도 정부가 정해준다


일생의 모든 결정이 국가정책과 맞물려 있는 이곳에서는 정부가 일자리 수요를 전망한 뒤 4년제 대학과 폴리테크닉(전문대학), 기술직 등 필요한 인원에 맞춰 어릴 때부터 진로를 설계해준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이면 인생의 첫 기로에 선다. 이때 국가시험을 치러 60%만 일반계 중학교로 가며, 고등학교 입시에서 다시 25%를 걸러내 대학을 준비하는 주니어칼리지로 보낸다. 나머지는 공업·실업계에서 미용, 운전 같은 기술을 배워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다.


대학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 모든 대학을 목표로 입시를 치르고, 진학한 이들에게는 정부가 지원을 해준다. NUS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는 코웨이지에(23)는 “전공을 정해서 깊이 들어가보고 싶은 분야가 있으면 계속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10점이에요.”


나라가 길러낸 최고의 인재들은 어떤 꿈을 꿀까. “공무원이 되거나 금융회사에 들어가려는 친구들이 많죠. 변호사, 의사도 쉽지는 않지만 인기 있고요. 저는 국제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하고 싶어요. 이런 꿈을 꾸는 학생은 별로 없지만, 제 부모님은 크게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난양대를 졸업한 중국계 탄(39)은 “주니어칼리지에 가면 ‘기프티드 트랙’(gifted-track)에 들어갔다’고 말한다”고 했다. 정부가 만든 이 ‘트랙’에 오르면 밝은 미래가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의미일 터다.


특히 공무원은 손꼽히는 고소득층이다. 생활이 안정돼야 부정부패가 사라진다고 판단한 정부는 공무원 급료를 올렸다. 그래서 관료들이 소득 순위 상위 5% 내에 든다. 리셴룽 총리는 2012년 연봉을 4분의 1이나 깎았는데도 여전히 220만싱달러(18억원)를 받는다. 장관, 대법관 연봉도 120만싱달러(10억원)에 이른다.


부모라면 자식이 기프티드 트랙에 올라타길 바랄 것이다. 한국보다도 사교육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탄은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영어와 만다린(중국어)의 두 개 언어를 쓰는 것도 이점이었어요. 부모님이 계속 일을 하시고, 학비도 엄마의 중앙적립기금(CPF)에서 나가 부담이 없었거든요.”


싱가포르의 주거는 주택개발청(HDB)에서 공급하는 아파트에서 70%가 이뤄진다. 외국인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값이 비싼 반면 싱가포르 국민들은 장기 저금리 대출같은 혜택이 많아 상대적으로 싼 값에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의 부동산 실거래 가격은 모두 공개된다. 투명한 거래를 위해서다. 최대 일간지 스트레이츠타임즈에 실린 가격 정보.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일종의 국가 강제저축인 CPF는 월급의 일부를 적립해 두는 계좌다. 이 계좌로 주택대출도 갚고 학비를 낸다. 기업은 직원의 CPF에 일정 비율로 적립을 해줘야 한다. 일자리가 있는 싱가포리안은 살 집이나 자녀 교육비 고민을 그만큼 덜 수 있다는 의미다. 국유지에 지은 주택을 99년간 장기임대하는 HDB 아파트는 국적자라면 거의 무이자로 대출을 받아 살 수 있다. 남은 임대기간, 위치, 매입자 연봉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나 집값의 2%, 대략 1000만원만 있으면 방 2개짜리 2억~3억원대 아파트를 바로 구할 수 있다. 대출금도 CPF를 통해 회사가 일부 내주는 격이니 상환에 큰 부담이 없다.


조이는 자신이 스물 한 살에 결혼한 이유가 집 때문이었다고 했다. “얼마 전만 해도 미혼자는 HDB 주택을 살 수 없었어요. 독립을 하려고 식을 올렸어요(웃음). ‘우리 HDB 신청할까’라고 말하는 게 프러포즈라니까요.” 신혼부부가 ‘영혼까지 끌어다’ 빚을 내야 겨우 집을 구하는 한국과 비교하면 여기는 천국이었다. 하지만 미혼자의 경우 35세가 넘어야 HDB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 정책은 주택이 정부가 주는 ‘선물’인 한편 결혼과 출산을 유도하는 ‘당근’임을 보여준다.



■‘보모 국가’의 숨겨진 아이들, 이주민


국가가 개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들을 구분해 주는 탓에 싱가포르는 ‘보모 국가(nanny state)’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한국 교민들은 “잘사는 북한”이라 표현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의 한 장면 같다고 하기도 했다. 출생마저 관리하에 이뤄지고 사고의 자유가 통제된 삶. 정부가 끼어들어 결정해주는 미래. 국가 발전으로 수렴되는 정책과 규칙들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마실 물조차 수입해야 하는 불모지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이들의 자부심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부를 무서워하죠. 국가를 믿는 만큼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을 하면 잡혀갈 수 있다’는 공포가 있습니다. 실제로 구금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도 여전히 ‘잡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재밌죠.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싱가포르와 강압적인 싱가포르라는 이미지가 공존하는 겁니다.” 졸로반은 국가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이렇게 설명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생기면서 분위기가 바뀌긴 했어요. 아주 조금. 벌금도 약화되고는 있지만 변화는 매우 느립니다. 10~15년 전보다는 지금이 낫고 앞으로 조금 더 나아지겠지만 속도는 세대교체 속도와 비슷할 거예요. 기존의 규칙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변형하는 것조차 힘든 사회거든요.” 이곳 사람들의 진짜 속내를 들여다보기는 그만큼 힘들 것이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싱가포르인들의 행복과 안락함을 받쳐주는 것은 그 이면의 이주자들이다. 싱가포르인이지만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시민단체 ‘홈’(HOME)에서 일하는 졸로반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가 매우 제한돼 있다고 했다. 효율성과 성장이 최고의 가치인 이곳에서는 경영자들의 권리가 늘 우선이다. 노동조합은 불법이고 최저임금 규정도 없다. 정부의 ‘트랙’에 올라탈 수 없는 저임금 이주노동자들에게 사회의 안전망은 없다.


거주민의 3분의 1인 160만명의 외국인 중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가 130만명에 이르지만 이들은 싱가포르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다. 여성들은 가사도우미, 남성들은 건설 노동자로 일주일에 엿새씩 일하면서 한 달에 많아야 50만원을 손에 쥔다. 지난 1월의 일요일, 한 쇼핑몰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움마이(38)는 친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는 참이었다. 인도네시아인 가사도우미들의 ‘왕언니’인 그를 친구들은 ‘네넥’(할머니)이라 불렀다.


움마이는 17살 때 싱가포르에 왔다. 일곱 식구의 집안일을 돕는 첫 일자리는 만만치 않았다. 주인은 세탁기는 물론 청소기, 고무장갑도 못 쓰게 했다. 빨래, 설거지, 청소를 맨손으로 했다. 집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물어내라고 다그쳤다. 잠은 현관에서 잤다. 아이들은 그를 괴롭혔다. 매일 밤 울며 지새우다 1년을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파산을 한 거예요. 2년만 일하고 공부를 하자는 생각에 다시 왔어요. 소망은 아직도 이루지 못했지만요.”


인도네시아 출신 가사도우미들을 이들의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 싱가포르의 한 쇼핑몰에서 만났다. 싱가포르에서 20년간 도우미로 일한 움마이(오른쪽)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하는 도우미들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중국인 가족 5명의 가사도우미로 취직을 했다. 이번엔 더 혹독했다. 새벽 4시부터 집안일을 시작해 온갖 시중을 들다 보면 밤 11시에야 일이 끝났다. 손빨래와 설거지로 손이 부르텄으나 약도 바르지 못했다. 집 밖에서 이웃을 만나 웃거나 인사를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참 어린아이들을 ‘마담’이라 불렀다. 끼니는 빵 한쪽, 물 한잔이 전부였다. 그렇게 일해서 한 달에 270싱달러(23만원)를 받았다. “잠자기 전에는 주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장실 청소를 했어요. 잠은 부엌에서 잤고요. 너무 배가 고파서 과자 하나를 먹다 들켰는데 어찌나 호통을 치는지, 전쟁이 난 줄 알았어요.”


■“약자들에 눈 감으면 편해진다”


움마이가 10년 전 ‘인도네시아가족네트워크’를 만든 것은 타향살이의 눈물과 설움을 끊어보려는 발버둥이었다. 어린 나이에 건너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동생들’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지난해 겨우 정식 등록단체로 인정을 받았지만 갈 길이 멀다. “여기서 일하려면 6개월마다 임신 검사를 받아야 해요. 아이를 가진 가사도우미는 추방됩니다. 지금은 임금 560싱달러를 받는데 여전히 낮아요. 법으로 해결하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계속 싸워야죠.”


쇼핑몰 앞 광장에 음료수와 과자 봉지를 들고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이 보였다. 뙤약볕에 찜통 같은 날씨였지만 연신 땀을 닦아내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일주일에 하루, 단비 같은 휴일을 즐기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밥값이 1만원을 훌쩍 넘는 쇼핑몰 식당 대신 마트의 저렴한 먹거리를 가져다 공터나 공원에 모여 친구들과 먹는다.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만 들어가면 에어컨 바람에 웃옷을 꺼내 입어야 하지만, 그 바람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막혀 있었다.


싱가포르 더비고트역과 연결된 쇼핑몰 ‘프라자 싱가프라’ 앞 공원에 일요일 오전 외국인노동자들이 먹거리를 들고 서 있다. 가사도우미, 건설노동자 등으로 일하는 이들은 쇼핑몰과 공원에 모여 일주일 중 유일한 휴일의 여유를 즐긴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 실태는 최근 몇 년 새 국제적인 이슈가 됐을 정도로 열악하다. 특히 가사도우미 학대는 악명 높다. 졸로반은 “정부의 지시에 따르면 좋은 교육을 받고 싼 집을 구하고 높은 임금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싱가포르”라면서 “이 구조에 만족하고 다른 사회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이들에게 ‘배제된 노동자들의 삶’은 관심 밖의 일”이라고 말했다. “사회의 모든 영역을 경제가 압도합니다. 뉴스와 정보, 교과서도 모두 한곳(정부)에서만 나오고요. 아마 심각한 경제위기가 오면 정치적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대만처럼.”


1954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리콴유 전 총리가 창당한 인민행동당(PAP)은 지금까지 한번도 정권을 내준 적이 없다. 고착화된 체제를 독재로 비판하는 시각도 있지만 국민들의 지지는 여전하다. 지난해 타계한 리콴유 추모 열기만 봐도 그랬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을 상대로 총리가 민사소송을 걸기도 한다.


싱가포르 곳곳에는 한끼를 5싱달러 안팎(4000~5000원)이면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식당들이 많다. 쇼핑센터에서 먹는 것에 비하면 반값 수준이지만 에어컨이 없고 물수건, 휴지 등은 제공되지 않는다. 아랍스트리트 부근 중국 식당(위)과 오차드거리의 한 호커 센터(아래)에서 주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반대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권단체 싱크센터의 시나판은 “왜 그런 단체를 만드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했다. “서슴없는 사형 선고, 무자비한 태형 같은 명백한 인권침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인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들 대답해요. ‘싫으면 떠나면 된다’고도 하죠.” 인도 출신인 그는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태형이나 집요한 벌금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규칙에 익숙해지면 벌금이 불편하지 않은 것처럼, 이주노동자나 약자들에게 신경쓰지 않으면 편안해지니까요.”


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끝까지 감춰지지 않는다. 정부가 2013년 인구백서에서 2030년까지 700만명으로 늘어나는 거주자 중 절반이 외국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자 시위가 금지된 싱가포르에서도 도심 한복판 집회가 열렸다. 중국계인 클라우디아(37)는 “직장이 있으면 나라가 저축을 해주고 의료나 보험은 물론 살 집을 구하는 것도 도와주지만 그게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라며 “외국인의 부동산 구매가 늘면서 임대료도 올라가고 생활물가도 올랐다”고 했다.


■전국에 ‘야간 금주령’


그들만의 규칙으로 깨끗하고 조용했던 대중교통이 점점 더 붐비고, 물가가 비싸지고, 주택정책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2010년 전까지 연평균 6%대였던 성장률은 지난해 2%, 올 1분기는 0%로 뚝 떨어졌다. 3년 전 시위는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를 더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심각한 저출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대책을 세웠건만 싱가포르 여성들의 출산율은 지난해 1.2명(유엔인구기금 기준)으로 한국(1.3명)보다 낮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른들은 직장에서 심한 경쟁을 하고 있어요. 청년층의 경쟁은 더 심합니다. 자식을 낳아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엘리세의 말이다. 국가가 기꺼이 보모가 돼주겠다는 나라에서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인 듯했다.


개인의 삶을 국가가 일일이 챙기는 것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 해도, 가정집 화분과 물받이의 모기유충 개수까지 검사해 벌금을 물린다는 말에는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퇴근 후 맥주 한잔으로 피로를 푸는 평범한 한국인에게 ‘전국 야간 금주령’은 사생활 침해 수준의 간섭이었다.


싱가포르의 상점 주류코너에 “오후 7시부터 오전 7시까지는 알코올 판매 금지”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싱가포르의 모든 상점에서는 평일 오후 10시30분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술 판매가 금지돼 있다. 계산대 전산시스템에서 이 시간대에는 주류 결제가 아예 불가능하다. 2013년 12월 리틀인디아 지역에서 인도 출신 노동자가 버스에 치여 숨진 뒤 이주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정부가 새로 도입한 야간 금주령이다. 금주 규정을 어기면 1000싱가포르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재발시 2000달러의 벌금이나 최대 징역3개월형에 처한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취재를 마친 늦은 밤,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집어드는데 또 경고문이 보였다. “오후 10시30분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는 주류를 판매하지 않습니다.” 아예 바코드를 찍을 수도 없었다. 상점에서 밤에 술 판매가 금지된 계기는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 출신들이 모여 사는 리틀인디아에서 그해 12월 인도인 건설노동자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숨졌다. 사건 처리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거리시위로 번졌다.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충돌이 일어나 경찰 수십명이 다치고 경찰차 수십대가 불탔다. 싱가포르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터진 것이다.


사건 이후 정부의 첫 번째 조치가 리틀인디아 지역에 내린 금주령이었다. 시위 원인으로 술을 지목한 것이다. 술 판매는 물론 밖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제한됐다. 리틀인디아의 중심 세랑군로드에는 야간 음주금지 경고문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이후 금주령은 모든 지역으로 확대됐다.

2013년 이주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리틀인디아 지역에서는 지난해 1월부터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됐다. 평일은 밤 10시30분부터 다음날 7시까지, 주말과 휴일은 오후 7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규제한다. 리틀인디아 지역의 세랑군로드에 금주 경고판이 설치돼 있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싱가포르 아랍스트리트의 하지레인은 예술가들의 공방과 독특한 패션의 옷가게들이 늘면서 최근 ‘뜨고 있는’ 거리다. 리틀인디아에서는 주말에 주류 판매는 물론이고 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금지돼 있으나, 하지레인에는 '불금'을 즐기러 거리로 나와 술을 먹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싱가포르|김보미 기자


아랍스트리트의 하지레인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 토요일과 일요일은 정오부터 자정까지 차량 통행을 막는 차없는 거리다. 이 때 거리에서 술집들이 반짝 영업을 한다.싱가포르|김보미 기자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불금’이 없을까.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아랍스트리트에 들어서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허가 없이는 공공장소에서 노래하는 것도,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금지된 이곳에서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들려오는 음악이라니.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즐비한 하지레인(Haji Lane)으로 들어서니 길거리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쇼핑몰마다 들어선 똑같은 브랜드와 식당이 지겨운 싱가포르인들에게 특이한 옷과 액세서리를 파는 상점들이 몰린 하지레인은 이국적인 골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양쪽 끝에 바리케이드를 둬 차량을 막은 100m 길이의 골목에는 간이탁자가 빼곡했다. 점원들이 분주히 오가며 술을 날랐다. 맥주와 양주, 칵테일 잔을 들고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사이로 담배연기가 구름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세랑군로드는 그 시간에도 금주령이 내려 있다. 술을 먹을 수 있는 곳도, 먹을 수 있는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시간도 국가가 정해주는 싱가포르. 그곳엔 불금의 즐거움조차 통제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