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댁이 무대 중간으로 나오자 앉아 있던 작은댁들이 인사를 한다. “다들 모였나. 앉게. 올해 스물셋이라고 했나. 아들 하나 낳아주면 살 만큼 땅문서를 주지.” 장면이 바뀐 무대에는 영감님이 작은댁이 차린 상을 받아 밥을 먹고 있고, 큰댁은 구석에 아이를 업고 앉아 있다. 영감은 “진범 애미는 진범이 안 보고 밥만 처먹어?”라고 하자 큰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다 먹었습니다”라고 힘없이 답했다. 그러자 영감은 “입은 크면서 왜 아들은 못 낳누?”라고 호통을 친다.
지난 9월 서울 관악구 행운동 우성아파트 주민회관에서 연극 <생의 계단>에 출연하는 할머니들이 대본연습을 하고 있다. 관악주민연대 제공
관악 지역 4곳의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연극을 준비하게 된 것은 6개월전부터다. 동네에서 10년째 독거노인들을 지원하고 있는 관악주민연대에서 소모임으로 연극연습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연극·미술 분야의 전문가 2명이 파견을 나와 도와줬고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써보기로 했다.
악극을 해보고 싶어 옛 동양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다 오빠에게 들켜 집에 감금됐던 할머니는 이번 연극에서 그 때로 돌아가 못다한 노래를 부른다. 황해도 황주에서 피난을 왔던 실향의 세월과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의 과정도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아들을 낳지 못한 큰댁의 사연은 소말람 할머니의 실제 삶이었다.
“옛날에는 다 그랬지. 영감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웃음) 근데 나보고 영감 역할을 하라잖아. 호통치는게 재밌었어.”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가 한 편의 극이었다. 4개 막마다 10~15분씩 구성하고, 제목은 헤르만 헤세의 <생의 계단>으로 붙였다.
33명의 할머니들이 인생 첫 연극을 만드는 데 지역주민들도 힘을 모았다. 카페는 무대를 꾸밀 장소를
내줬고, 동네식당에서는 떡과 통닭, 김치 등 당일 먹거리를 해주기로 했다. 주민 70~80명은 십시일반 300만원을 모아줬다.
오는 29일 낙성대 ‘오렌지연필’에서 열리는 본공연에 이들 주민 100여명을 관객으로 초청했다. 주민연대 정은진씨는 “독거노인들은 물질적인 것보다 관계 결핍이 더 큰 문제여서 그동안 해보지 않은 예술활동을 시작했다”며 “연극을 연습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만 이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구나’하며 정서적 만족을 얻어 할머니들이 격주로 하는 연습날짜만 기다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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