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미국의 3대 외교 브레인
미국 외교계의 거물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6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89세.
브레진스키의 딸인 MSNBC 방송 앵커 미카 브레진스키는 이날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모닝 조>에서 “가장 영감을 많이 줬고 딸에게 더없이 헌신적이었던 아버지”가 버지니아의 한 병원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미국의 3대 ‘외교 브레인’으로 꼽히는 그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1970년대 미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잡은 전략가였다. 1928년 폴란드 귀족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독일, 캐나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캐나다에 정착했다. 몬트리올의 맥길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76년 카터 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자리를 맡았다.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대립을 중재, 양국 수교를 끌어냈다. 같은 해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해 베이징을 찾아가기도 했다. 1979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 대응,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대응도 그의 전략에서 나왔다.
브레진스키는 민주당 정부에서 일했지만 외교적 이상론이 아닌 현실주의적 접근을 주도했다. 대소련 정책에서는 대표적인 매파로 분류된다. 퇴임 후에는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고문과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교수로 재직하면서 최근까지도 외교, 정치 현안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브레진스키는 외교 문제에 정통했던 아버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탈냉전 시기 국제 전략을 높이 평가했지만, 아들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부시가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과 이란, 이라크 가운데 북한이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저서 등을 통해 실효성 없는 이라크전쟁을 ‘F학점짜리 실패한 전략’이라 규정했다. 1990년대부터 북한의 핵 개발 위험성을 경고하며 미 정부에 강력한 제재를 요구하기도 했다.
올 2월에는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를 비판했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나 ‘미국 우선주의’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나 쓸 구호라는 것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캠페인 슬로건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7년 정치 경험이 짧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선 경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 힘을 실어준 적도 있다.
브레진스키는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 신군부 쿠데타 등이 이어진 1970~1980년대 한국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5년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미국 기밀문서에는 1980년 5·17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이후 신군부와 백악관 사이의 긴박했던 협상 내용이 남아 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확대하면서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26명을 구속, 내란예비음모 등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했다. 이듬해 1월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백악관 수뇌부에 도움을 청했다.
브레진스키는 1980년 10월 카터에게 보낸 서한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사정을 살피려 장교를 보내왔다. 김(김대중)이 사형을 당하면 미국 내 수많은 단체가 항의시위를 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북한에만 혜택이 돌아갈 것임을 명확하게 알렸다”고 썼다.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신군부와 김 전 대통령 사형에 반대하는 백악관 간의 막후 접촉이 벌어졌다. 이듬해 초 출범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취임 다음날 전두환의 방미 계획을 발표했고, 사흘 뒤 김 전 대통령은 감형됐다.
브레진스키는 백악관을 나온 후에도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을 만나거나 저서와 언론 기고를 통해 한국 외교에 대한 조언을 이어갔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한국의 외교적 위험을 경고하고 일본에 한·중 등 주변국과 관계를 개선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