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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이슈/서울이야기

여든 살 할매들 ‘지난한 삶’ 연극으로

by bomida 2015. 10. 21.


ㆍ서울 관악구 33명의 할머니, 대본 연습 한창

큰댁이 무대 중간으로 나오자 앉아 있던 작은댁들이 인사를 한다. “다들 모였나. 앉게. 올해 스물셋이라고 했나. 아들 하나 낳아주면 살 만큼 땅문서를 주지.” 장면이 바뀐 무대에는 영감님이 작은댁이 차린 상을 받아 밥을 먹고 있고, 큰댁은 구석에 아이를 업고 앉아 있다. 영감은 “진범 애미는 진범이 안 보고 밥만 처먹어?”라고 하자 큰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다 먹었습니다”라고 힘없이 답했다. 그러자 영감은 “입은 크면서 왜 아들은 못 낳누?”라고 호통을 친다.

평균 나이 여든 살의 할머니들이 준비 중인 연극 <생(生)의 계단> 중 ‘작은 할머니들’의 한 장면이다. 지난 20일 서울 관악구 행운동 우성아파트 주민회관에 할머니 10명이 모여 대본 연습이 한창이다. 영감 역할을 맡은 소말람 할머니(80)가 큰댁 역인 김숙자 할머니(83)에게 소리를 치자 김 할머니는 “더 크게 해야지” 하며 다시 발성을 가르쳐준다. 

출연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상인 할머니(91)는 작은댁 면접을 보러온 스물셋 아가씨 역할을 맡았다. “대사를 많이 못하지만 추임새는 넣을 수 있어. 다시 젊어졌으니 좋아.” 마지막에 작은댁이 노래 ‘봉선화’를 부르며 이번 막이 끝나자, 할머니들은 “작은댁이 왜 처량하냐. 큰댁이 처량하지”라고 한마디씩 하며 웃었다. 두 할머니가 마주보며 ‘봉선화’를 부르는 것으로 대본을 수정했다. 이날 연습은 2시간 넘게 이어졌다.



지난 9월 서울 관악구 행운동 우성아파트 주민회관에서 연극 <생의 계단>에 출연하는 할머니들이 대본연습을 하고 있다. 관악주민연대 제공



관악 지역 4곳의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연극을 준비하게 된 것은 6개월전부터다. 동네에서 10년째 독거노인들을 지원하고 있는 관악주민연대에서 소모임으로 연극연습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연극·미술 분야의 전문가 2명이 파견을 나와 도와줬고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써보기로 했다.


악극을 해보고 싶어 옛 동양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다 오빠에게 들켜 집에 감금됐던 할머니는 이번 연극에서 그 때로 돌아가 못다한 노래를 부른다. 황해도 황주에서 피난을 왔던 실향의 세월과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의 과정도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아들을 낳지 못한 큰댁의 사연은 소말람 할머니의 실제 삶이었다.


“옛날에는 다 그랬지. 영감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웃음) 근데 나보고 영감 역할을 하라잖아. 호통치는게 재밌었어.”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가 한 편의 극이었다. 4개 막마다 10~15분씩 구성하고, 제목은 헤르만 헤세의 <생의 계단>으로 붙였다.


33명의 할머니들이 인생 첫 연극을 만드는 데 지역주민들도 힘을 모았다. 카페는 무대를 꾸밀 장소를 내줬고, 동네식당에서는 떡과 통닭, 김치 등 당일 먹거리를 해주기로 했다. 주민 70~80명은 십시일반 300만원을 모아줬다.

오는 29일 낙성대 ‘오렌지연필’에서 열리는 본공연에 이들 주민 100여명을 관객으로 초청했다. 주민연대 정은진씨는 “독거노인들은 물질적인 것보다 관계 결핍이 더 큰 문제여서 그동안 해보지 않은 예술활동을 시작했다”며 “연극을 연습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만 이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구나’하며 정서적 만족을 얻어 할머니들이 격주로 하는 연습날짜만 기다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