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시내 스카이라인이 펼쳐진 ‘골든 트라이앵글’ 강변을 따라 지난 3월 선박 한 척이 지나고 있다. 3개의 강줄기가 만는 골든 트라이앵글은 피츠버그가 산업혁명 시절 생산한 철강 등을 실어 나르는데 좋은 교통망 역할을 했다. 피츠버그|AP연합뉴스
대낮에도 밤처럼 짙은 어둠이 깔렸다. 거리의 가로등은 24시간 켜둬야 했다. ‘연기의 도시(smoky city)’. 뿌연 스모그는 피츠버그에선 번영의 상징이었다. 철강이 가장 유명했지만 알루미늄, 유리 등 산업에 필요건 뭐든 만들어 낸 제조업의 메카. 면적은 작아도 뉴욕·시카고에 이어 많은 일자리가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곳에 50년간 살아온 주민 론 바라프는 “연기가 있을 때 가장 잘 살았다는 생각이 있다”며 “그래서 그땐 환경이 파괴됐다는 사실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고 CNN에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파리 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하며 “파리가 아닌 피츠버그”를 내건 것은 1940년대 피츠버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도시의 옛 정체성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엔 인구 30만명인 펜실베이니아주의 이 작은 도시가 굴뚝산업에서 벗어나 교육과 의료에 강한 녹색혁신도시가 되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재건의 노력이 빠져 있다.
2016년 9월 차량공유업체 우버는 자율주행차를 최로로 시범 운행할 장소로 피츠버그를 택했다. 빌 페두토 시장은 포브스 인터뷰에서 “우버는 보조금이 아니라 도시 자체를 기꺼이 연구소를 만들려는 곳을 찾고 있었다”며 “피츠버그는 수십년간 연구를 해온 대학이 있고 이미 자율주행차도 개발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연기 대신 ‘녹색’이 깔린 이 도시엔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보쉬와 노키아, IBM 등 1600개 기술 기업들이 들어와 있다. 이 기업들이 피츠버그에서 직원들에게 주는 급여만 연 207억 달러다. 68개의 대학, 포춘500에 선정된 8개의 기업, 미국 상위 300개 로펌 중 6개가 이곳에 본사를 뒀다. 트럼프가 간과한 것은 이 도시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피츠버그는 1762년 석탄층이 발견됐고 3개의 강 줄기가 만나 교통망을 갖춘 축복받은 도시였다. 석탄 생산량은 1880년 430만톤에서 1916년 4000만톤으로 정점을 찍었다. 1000개가 넘는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았고, 40년만에 주민은 2배가 늘어 1940년 67만명을 넘었다. 강력한 제조업이 바탕이 돼 1950년대 고용은 38만명까지 확대됐다. 지금의 인구를 감안하면 당시 도시의 활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대가는 땅과 물, 공기의 무차별한 파괴였다. 1800년대부터 규제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호황을 가져다준 스모그는 “폐에도 좋고 작물을 잘 자라게 한다”고 주민들은 믿었다. 지난 세기 초 피츠버그의 장티푸스 사망률은 전국에서 가장 높아 평균치의 3배나 됐다. 1941년 시 의회가 석탄생산제한법을 추진했지만 경제 악영향을 우려해 무산됐다. 석탄의 시대가 저물며 천연가스, 디젤 기관차가 등장하고 1946년 시장직에 오른 데이비드 로런스는 “지속가능한 경제로 도시의 혁신과 평등, 더 깨끗한 피츠버그를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환경 정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40년 미국 펜실베이나주 피츠버그 도심 리버티 거리와 5번가가 만나는 지점의 모습.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가로등이 켜져있다.나사 홈페이지(NASA visible earth)
1980년대 철강산업이 쇠락하자 도시의 연기는 현격하게 줄었다. 공장들은 문을 받고 수백개 기업이 떠났다. 실업률은 1970년 후반 20%를 넘어섰고 도시는 파산 직전까지 갔다. ‘애팔래치아의 파리’로 불렸던 피츠버그는 번영의 유산을 새 기반으로 삼았다. 의료기관과 연구소, 도서관, 박물관과 공원, 다양한 문화지구, 미국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술집이 자원이 됐다. 시는 의학과 신기술, 청정에너지 투자를 늘렸고 지역 시민·문화 단체들이 도시 재건을 뒷받침했다.
생명과학과 ICT, 서비스업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카네기멜론 대학교와 피츠버그 대학교가 보유한 생명과학 분야 연구 지식 및 지적 재산이다. 대학들을 중심으로 산업이 집적돼 지역 제조업체가 성장하는 바탕이 됐고, 서구 대형 제약회사가 제조 거점을 그곳으로 옮기는 일까지 일어나 새로우운 고용의 밑받침이 만들어졌다.(젊은이가 돌아오는 마을 183p)
특히 환경엔 엄격했다. 수질은 환경보호청(EPA) 기준보다 높게 관리하고, 1400㎞ 거리에 3만100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열섬효과나 폭우를 막기 위해 녹색지붕(green roofs)을 조성했다. 도심 숲은 정서적인 안정과 에너지 절약, 공기 질 개선 등으로 연 1000만~1300만 달러의 효과가 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피츠버그는 2000년 이후 미국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로 6번 꼽혔다.
직원 5만명의 피츠버그대 의료센터를 비롯, 의료서비스에서 11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생겼다. 재생가능에너지 산업에서 1만3000명이 일한다. 우버는 지난 1년반 동안 6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했고, 연말까지 규모는 수천명을 넘을 전망이다. 페두토 시장이 “우리 시민과 경제, 미래를 위해 피츠버그는 파리협정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당연하다. 기후변화 대응에 반대하는 도시로 낙인찍힐 경우 지역 경제를 이끄는 대학들의 첨단과학 연구기금만 깎일 수 있다.
트럼프는 옛 기간산업의 영광을 재연하겠다고 했지만 피츠버그에 남은 석탄 광부는 1000명이 안 된다. 폴리티코는 “경제를 1980년대로 되돌릴 수 없는 정부가, 제조업으로 회귀를 시도한다면 피츠버그 경제는 다시 한번 붕괴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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