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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우고 차베스 타계] 불평등·가난과 싸운 사회주의 영웅이자 14년 집권 독재자

by bomida 2013. 3. 6.

ㆍ‘혁명의 풍운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국민들이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선택한 혁명의 풍운아였다.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주의 혁명을 기치로 1998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뒤 빈민층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14년간 장기 집권한 중남미의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이다. 지난해 대선 승리로 집권 20년의 길을 열었지만 암에 발목을 잡히며 마지막 임기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5일(현지시간) 눈을 감았다. 


▲ 자본주의 넘어선 대안 모색
양극화 해소 경제 개혁 성과
기득권층은 ‘권위주의’ 비판


▲ 반미·중남미 통합에도 앞장
병마로 신사회주의 꿈 접어


1954년 7월28일 수도 카라카스 남서쪽의 작은 시골 마을 사바네타에서 태어난 그는 화가와 야구선수를 꿈꾼 평범한 소년이었다. 197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75년 임관해 군인의 길을 걷던 청년 차베스의 눈에 베네수엘라의 불평등과 부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 모순을 바꿀 정치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82년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사회주의 성향의 정치모임 ‘볼리바르 혁명운동’을 만들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정권의 국고 횡령에 분개한 시민들의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되자 차베스는 1992년 동료 장교들과 함께 정권 전복을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투항 조건으로 대국민 연설을 내걸었다. 뜻은 받아들여져 그는 혁명의 대의를 밝히며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나 혼자 책임지겠다”고 연설했다. 당시 카리스마 넘쳤던 이미지는 대중에게 강렬하게 남았다. 이는 2년 뒤 출소한 차베스가 정치에 입문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이 2001년 8월 75번째 생일을 맞은 피델 카스트로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베네수엘라 동부 카나이마 국립공원에서 카누를 타고 강을 유람하다 군중의 환호에 답하며 손으로 V자를 그리고 있다. 차베스는 생전 카스트로를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아버지”로 부르며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카나이마 | AP뉴시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차베스는 1994년 3월 다시 세를 모았다. 볼리바르 혁명운동을 ‘제5공화국 운동’으로 이름을 바꾼 뒤 사회주의운동당, 애국당과 연대해 좌파연합 애국전선을 결성했다. 탄탄한 지지기반을 만든 차베스는 199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56.2%의 표를 얻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의 나이 44세, 역대 최연소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었다.

정권을 잡은 그는 매장량 규모 세계 2위인 석유를 무기로 국내적으로 사회주의적 개혁조치를, 국제적으로는 중남미 통합운동을 벌였다. 차베스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차베스는 1958년 ‘푼토피호’ 협약 이후 40년간 지속된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의 보수 양당체제를 끝내고 이들이 독식하던 국영석유공사의 수입을 빈민층과 중하층으로 돌려 빈부격차 해소를 꾀했다. 또 빈농 정착촌을 꾸려 집과 땅을 제공하고 갖가지 보조금을 국민들에게 돌려줬다. 

“예수는 혁명가”라고 말한 차베스는 선교사의 열정으로 베네수엘라를 바꾸자고 말하곤 했다. 이 때문에 그가 주도한 일련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에는 ‘미시온(선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맹퇴치를 위한 ‘미시온 로빈손’, 무상 고등교육인 ‘미시온 리바스’ 등이 그것이다. 

베네수엘라 석유와 쿠바 의료의 맞교환에 의한 무료 의료 사업은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라 불린다. 차베스의 ‘미시온’은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03년 62.1%에서 2007년 33.6%로 줄었고, 2011년 31.9%에서 안정화됐다. 집권 초기 50%를 넘나들던 실업률을 2011년 32%로 끌어내렸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3년 3482달러에서 2011년 1만2000달러로 증가했다. 


인구의 40%인 극빈층은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불렀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도 거셌다. 차베스는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1999년 의회를 해산하고 차베스식 노선을 강조한 신헌법을 국민투표에서 통과시켰다. 이듬해 새 헌법하에서 치른 대선에서 60%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하며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굳혔다. 차베스는 집권 3년차인 2002년 쿠데타로 사퇴했다가 3일 만에 복귀했다.

임기 연장에 대한 열망이 커진 그는 2007년 헌법의 대통령 연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려고 국민투표라는 강수를 뒀다가 패배했지만 2009년 다시 치른 국민투표로 이 규정을 삭제하며 장기 집권의 숙원을 풀었다. 이 같은 권위주의적 행보가 민주주의를 퇴보시킨다는 비판도 적잖다. 외국 기업들을 국영화하고 반정부 성향의 언론사를 장악하며 외환도 통제했다. 빈민의 추앙을 받았지만 베네수엘라 중산층 이상의 국민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 것도 이 때문이다. 지지층 결집 못지않게 반대세력도 결집시켜 2006년 선거 이후부터 양극적 대립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차베스에게 우호적인 진영에서도 양극화를 순화시키고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을 강화한 것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완전히 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너무 강력한 국가주의”에는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차베스가 결정하고, 차베스가 발표”하면서 차베스 이외의 대안적 리더십이 자라날 공간도, 공동의 토론공간도 없다는 비판도 받았다. 

차베스는 유엔 총회에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비난하는 등 집권 이후 줄곧 반미 외교를 폈다. 자신의 집권 14년을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부른 것도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남미를 해방시키고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시도한 시몬 볼리바르(1783~1830)처럼 중남미에 정치·경제적으로 개입해온 미국에 맞서 중남미가 단결해야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석유를 시장가격보다 낮게 공급하는 카리브해 석유동맹인 ‘페트로카리브’를 출범시켜 남미 좌파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차베스는 2011년 6월 골반에서 종양이 발견된 후 2년간 세 차례에 걸쳐 악성종양 제거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지난해 2월 암 재발로 출마가 불투명해졌지만 7월 ‘암 해방’을 선언하고 선거 운동을 완주하며 네 번째 임기를 확보했다. 

차베스는 지난해 대선 승리 후 “과거의 실수를 인정한다”면서 “베네수엘라는 21세기 민주사회주의를 향한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며 이전과 다른 ‘포용 정치’를 시사했다. 그러나 결국 대선 직후인 지난해 12월 네 번째 암수술을 받으러 쿠바로 떠났지만 치료에 실패하고 고국에 돌아와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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